1. 자아(自我)를 소멸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2. 법문(法門) : '나 있음'이나 '나 없음'이나 전부 빈 말일 뿐이다.
  3. 공안(公案) : '근본 마음'은 알거나 깨달음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4. 게송(揭頌) : 도(道)는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는다.
 
     
   
     
   

 흔히들 '자아(自我)를 소멸시킨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과연 자아를 소멸시킬 방법이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자아가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건 간에 당연히 없앨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갖게된다.

 자아를 소멸하기 위해 수행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을 보면, 대개 모든 것을 끊고, 털고, 버리고, 비우고 등등.· · · · · · 물론 그것도 예삿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을 통하여 자아를 소멸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좀더 진지한 수행자라면 지금 이 자아를, 나뉘기 이전의 '본래 자리', 그 이름이 진리가 됐건, 해탈이 됐건, 낙처(落處)가 됐건, 그 본체자리에 계합(契合)시킴으로써 마침내 자아를 소멸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 자아를 계합시키려는 대상, 즉 '지극히 근원적이고 영원하고 숭고한, 보다 큰 그 본래 자리'라는 것도 결국 '나'가 투영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 · · · · 궁극적으로 '나'가 투영한 것을 '나'가 경험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식의 수행이라면, 소멸하고자 하는 자아는 그 경험을 통해 오히려 강화만 될 뿐이다.

 수행이라는 이름의 모든 노력과 그 공덕으로 인하여 얻어지게 될 깨달음의 자리라는 것이 결국 시종일관하여 의식의 영역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이다.· · · · · · 의식의 활동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모두가 자아를 강화하는 경험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아를 소멸시킬 방법은 없는 것인가?· · · · · ·

 우선 소멸시켜야 할 그 자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 · · · · · · · · · · 이쯤 되면 만법이 성품이 없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미 뭔가를 실체로 인정하고 그것을 붙잡고 옥신각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 · · · · 자아라는 것이 본래 성품이 없어서 애초에 난(生) 일이 없거늘 다시 무엇을 일러 '나'라고 한단 말인가? 또한 난 일도 없는데 소멸시켜야 할 것은 또 무엇인가?

 결국 환화공신(幻化空身)인 이 몸과 입과 뜻(三業)으로 짓는 모든 일은 꿈속과 같아서 전혀 실다움이 없고 의거(依據)할 바가 없는 것이니, '나 있음'이니 '나 없음'이니 하는 말은 전부 빈 이름만 그럴싸하게 있는 것이다.

 인연 가화합(假和合)으로 이루어진 이 '나'는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마치 초목와력(草木瓦礫)과 같이 지각(知覺)도 없고 힘도 없는 것이 진실이니, 자아라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망정(妄情)이 맺혀서 된 허구(虛構)임을 알아야 한다.



 다음 경전의 말씀을 보며, 문득 한 생각 일어나면 곧 그 근원을 돌이키지 못하고 계속 그 말단에서 '나 있음'인가 '나 없음'인가, '나 있음'을 어떻게 '나 없음'으로 바꿀 것인가 하는 따위의 생사법(生死法)에서 훌쩍 마음을 거둠으로써, 그 무엇도 조작하는 일 없이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아, 더 이상 이름을 짓거나 뜻을 짓는 일 없이 잠잠히 그 자리를 밟아야 할 것이다.



 『온갖 법은 모두가 인연에 속할 뿐이어서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범부법이 될 수도 없고 성인법이 될 수도 없다. 제 성품이 없고, 오직 인연으로 생길 뿐이기 때문에 진리(眞)거나 범속(俗)이거나 간에 서로 뒤섞여도 범람(氾濫)하지 않는다.

 온갖 것이 그대로 하나이기 때문에 이 모두가 제 성품이 없으며, 또한 하나가 그대로 온갖 것이기 때문에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하다.

 비록 인과법이 역연하다 하더라도 '성품 없는 도리'(無性之理)를 잃지 않으며, 또한 비록 성품이 없다 하더라도 인연생기(緣生)의 길을 허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