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물이 세차게 흘러도 흐르는 일이 없다.
  2. 법문(法門) :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망상이다.
  3. 공안(公案) : 지혜가 세속 따라 차별이 있을지언정 지혜 '자체'는 조그만 시간의 변천도 없다.
  4. 게송(揭頌) : 삼세(三世)에 아무 물건도 없고, 마음도 부처도 모두 없나니 · · · · · ·
 
     
   
     
   

 인간은 모두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심지어 '우리는 시간의 결과물'이라고도 말한다. 무수한 지난 과거가 모여 현재의 이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고 보면,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 존재는 전적으로 시간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이 없으면 인간은 생각조차 굴릴 수 없다. 생각이라는 것은 수많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 존재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전적으로 인간의 망상으로 빚어낸 허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 때 느끼게 될 당혹감이나 황당함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아무리 수긍하기 힘들고 소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토록 절대적인 것으로 믿어왔던 시간의 본질을 깊이 헤아려 그 허상을 밝혀내지 않고서는 이 공부는 단 한 치도 깊어질 수 없다.
 


'이 세상엔 그 어떤 것도 지속되는 법은 없다'는 말은 곧잘 수긍을 하면서도, 그 '어떤 것'이 '나'일 때에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경우가 많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라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 앞에서는 더더욱 곤혹스러워 한다. 이것은 결국 삶의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를 의심할 여지없이 확고히 믿고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죽 지속되어온 '나'라는 생각.· · · · · · 태어나면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 속에 지속적으로 죽 존재했다고 '으레히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나',· · · · · · 그러나 그 시간을 극미(極微)로 세분했을 때, 그 매 찰나, 찰나의 '나' 중에서 과연 그 어느 때를 지칭하여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속되는 실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생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 · · · · 입으로는 불천(不遷)의 이치를 말하면서도, 어머니 배밖에 나왔을 때의 '나'가 여전히 지금의 '나'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천년 만년이 가도 깨달을 분수는 없다.

 다음 경전의 말씀을 깊이 숙독(熟讀)하여 불천의 이치가 확연해져야, 그 모든 시간의 굴레를 훌훌 벗어 던지고 성큼성큼 그 공부가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불천론(不遷論)에 이르기를,· · · · · ·


 『회오리바람이 큰산을 쓰러뜨리는데도 항상 고요하고, 강물이 세차게 흐르는데도 흐르지 않고, 아지랑이가 두루 치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해와 달이 하늘을 돌아다니는데도 돌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소(疏)에 이르기를,· · · · · ·

 『'앞의 바람'이 '뒤의 바람'이 아니므로 큰산을 쓰러뜨리는데도 항상 고요하고, '앞의 물'이 '뒤의 물'이 아니므로 세차게 흘러도 흐르지 않으며, '앞의 기(氣)'가 '뒤의 기'가 아니므로 떠다니며 치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앞의 해'가 '뒤의 해'가 아니므로 늘 돌고 돌아도 돌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다시 초(抄)에 이르기를· · · · · ·

 『자체(自體)는 생각생각마다 동일하지 않나니, 첫 번째의 한 생각이 일어날 때는 두 번째의 생각일 때가 아니다. 맨 나중에 바람이 불어서 산에 닿았을 때는 처음에 바람이 일어난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앞 생각'일 때의 바람 자체가 결코 그로부터 와서 산에 불린 것이 없다. 산도 또한 처음 움직였을 때로부터 땅에 쓰러질 때까지 산 자체는 생각생각마다 동일하지 않다.(지속적인 존재가 아님).

 따라서 처음의 한 생각에 움직일 때는 두 번째 생각에 움직일 때가 아니며, 마지막에 땅에 닿았을 때는 처음에 움직였을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처음 움직인 산 자체가 결코 그로부터 와서 땅에 닿을 때까지라는 것은 없다.(시간적 간격이 없음) 결국은 바람이 이르지도 않았고, 산이 땅에 닿지도 않았다. 비록 회오리바람이 큰산을 쓰러뜨렸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움직인 일조차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경우, 세간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무엇이 변천하고 이동한다고 여기지만, 그 관(觀)의 힘이 깊어진다면 아무리 바람이 산을 쓰러뜨리고 하늘을 지난다 해도, 그것들이 모두 서로 알거나 이르지도 않는 것이니, 다만 생각생각마다 스스로 머물 뿐, 변천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계속 불천론에 이르기를· · · · · ·


 『여래는 (중생이) 온갖 망정(妄情)에 걸려 있는지라 방언(方言)으로 미혹을 밝히되, '둘 없는 진심'을 타고, '하나 아닌 특수한 교법'을 토로하셨으니, 차별되면서도 다를 수 없는 것은 오직 성인의 말씀일 뿐이로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변천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세속을 교도하면서 '유동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니, 비록 천 갈래로 다르게 말하더라도 돌아가는 데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글을 좇는 무리들은 '변천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이내 '옛날 물건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다' 하고, '유동한다'는 말을 들으면 곧 '지금의 물건이 옛날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갔음'을 말하나 반드시는 가지 않아서, 예와 지금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까닭이요, '지나갔음'을 말하나 반드시는 지나지 않아서 지금이 옛날에 이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오지 않은 연고이다. 오지 않으므로 예와 이제에 빨리 내닫지 않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문다.

 지금이 옛날로 갔다면 옛날에는 지금이 있어야 하고, 옛날이 만약 지금에 왔다면 지금에 옛날이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에는 옛날이 없으므로 오지 않았음을 알겠고, 옛날에는 지금이 없으므로 가지 않았음을 알겠다.

 옛날은 지금에 오지 않았고, 지금도 옛날에 가지 않았으니, 따라서 그 일은 각기의 성품으로 머물러 있겠거늘 무슨 물건이 가고 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으니, 고석(古釋)에 이르기를· · · · · ·



 『「예와 이제는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물되, 서로 오고 가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곧, 젊은 때와 늙은 때가 동일한 빛깔이 아니고, 실로 젖먹이로서 엉금엉금 기어다니던 때부터 늙어 꼬부라지기까지 '주욱 이어지는 것'(持續)이 없다는 뜻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친속간(親屬間)의 법이 상실되고, 아버지도 없고 아들도 없으면서 젖먹이는 아버지가 되고, 기어다니던 아기와 늙은이도 분간되지 않아야 한다면, 앞의 공(功)은 이내 상실되어 단멸(斷滅)의 허물이 있으리라.

 곧, 공업(功業)은 흐르고, 인·과는 상속되면서 상실되지 않으며, 아주 없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으면서(不常不斷)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不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므로(不來不去) 원만하고 바른 불천(不遷)의 이치가 분명하다.

 또 「'둘 없는 진심(眞心)'을 타고 '하나 아닌 특수한 교법'을 토로한다」 함은 곧, 모든 성인은 한 마음의 정종(正宗)에 의지하여 근기에 알맞게 차별된 교법을 연설하나니, 비록 구류·팔교(九流 八敎)가 같지 않더라도 변천하지 않는 한 생각은 이지러짐이 없다. 따라서 아무리 천 갈래로 서로 다르게 창도(唱導)한다고 하더라도 모이고 돌아가는 데는 같은 데로 이른다.

 그러나 글을 따르면서 뜻(旨)을 잃은 권문(權門)은 생멸의 말만을 집착하면서, 망령되이 세간의 모양(世間相)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며, 따라서 '세상사(世上事)는 유동(流動)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경계를 따라서 윤회(輪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고 죽고, 가고 오고 하는 일체의 변천이 마침내 성품이 없음을 자못 모르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