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지(聖智)는 '앎'이 없으므로 '앎이 없음'이 없다.
  2. 법문(法門) : 그 무엇도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은 없다.
  3. 공안(公案) : 지금 <모르는 그것>이 바로 '부처'이니, 앎과 모름은 하나도 아니요,둘도 아니다.
  4. 게송(揭頌) : '참 앎'은 앎이 없나니· · · · ·
 
     
   
     
   

 흔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있는 그대로 봐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요. 그걸 알지 못하면 잘 되니, 잘 안 되니 하는 판단을 할 수가 없지 않겠소?· · · 그렇게 뭔가를 판단하거나 긍정, 혹은 부정하려면 반드시 어떤 잣대나 틀이 있어야 해요. 틀이 없으면 우리는 긍정, 부정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어떠한 기준이나 틀을 이미 갖고 있다는 소리니 그것은 처음부터 시작이 잘못 된 거요.



 늘 하는 소리지만 진리라는 것은 개념화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헤아려 알 수도 없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의 변죽을 울리는 것뿐, 말은 끝내 불요의(不了義)요. 그것은 우리의 상념과 지식, 지혜를 가지고는 헤아려 알 수가 없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저 까마득한 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가 지금 순간순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거수일투족,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사실은 다 불가지인 거요.





 뭔가에 걸렸다면, 그 사람은 이미 뭔가를 지향하고 있었던 거요. 어떻게 돼야 할 것, 이루어야 할 것,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생각과 사고(思考)가 활동을 시작하는 거요. 그런데 어떻소? 흔히 가부좌 틀고 면벽수행 하는 사람들, 지금 망심망상을 억제하고, 무심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사고의 흐름을 강제로 억압하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거요.· · · 사고의 흐름을 억압하는 노력 그 자체가 바로 사고 활동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거요. '내'가 뭔가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한, 사고의 활동은 절대로 멈추지 않소. 그러니 노력하지도 말고, 억압하지도 말고, 쓸어내어 추방하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거요.· · · 그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한, 절대 그치지 않으니, 직절문(直切門), 문득 끊고 들어가라 하는 얘기가 나오는 거요.



 지혜로운 사람은 말에 붙잡히지 않소. '모든 것이 비었다'는 말을 들어도 '비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 그 자체가 비어버리는 거요.· · ·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은 '나 자신', 그리고 자아의 자기중심적인 활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오. 경전을 많이 읽고 법문을 많이 들어 지식을 쌓고 경험을 쌓아 장차 훌륭한 '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전부 자아를 강화하는 것일 뿐, 거기에는 절대로 해탈이 없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에는 '내 입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소. 그 자리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로 나뉘기 이전의 본래 하나인 자리요. 그 하나의 본체가 자꾸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지금 중생이 헷갈리기 시작한 연원이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라' 할 때, '있는 그대로 보는 나'가 있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이 따로 있으면, 그 사람은 과거에 하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거요.



 가령 예를 들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할 때, 그 벗어나고 싶다는 바램을 내는 그 핵심이 바로 '나'요. 그런데 그 벗어나고 싶은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능·소(能所)가 본래 없는 거요. 주체와 객체가 없는데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고통스러울 때에 '고통 받는 나'와 '고통'이라는 이중적인 구조가 마음속에 드리워져 갈등을 낳는 거요.· · · '고통 받는 자'가 계속 그 '고통'을 쓸어내려 하고있다는 소리요.· · · 그런데 '고통 받는 자'와 '고통'이 둘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가 곧 '고통'이고, '고통'이 곧 '고통 받는 자'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 · 문제의 핵심이 이것이오. 참으로 한 마음 뿐인데, '고통 받는 자'와 '고통'이라는 두 가닥의 서로 상이한 흐름이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착각이 우리 사고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는 거요.



 당신 자신이 '고통'이고, '고통'이 곧 당신 자신이라면, 그때에도 당신은 '나는 고통 받고 있다'고 말하겠소? '나는 고통이 싫다'고 말할 수 있겠냔 말이오?· · · 얼음은 스스로 차갑다 안 하고, 불도 스스로 뜨겁다고 안 하는 법이오. '고통 받는 자'와 '고통'이 둘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이미 '나는 괴롭다'고 말할 놈은 없소. 또 그 괴로운 감정에 대해 괴로움이라고 이름짓는 자도 없소.· · · 두 법이 없는 데에서 두 법을 만들어놓고, 그게 실제인 줄 알고 추구(追求)하고 혹은 회피하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인 거요.





 극복하려 하거나 벗어나려고 애쓰는 한 절대로 그리될 수 없소. 그리 하려는 '나'가 있기 때문이오.· · · 이름도 짓지 않고,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고, 모든 경험과 아는 바가 아득히 사라져서, 마치 큰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 그냥 비추는, 분석하려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는, 기존의 어떤 지식도 기억도 동원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을 그냥 볼 뿐일 때에, 그제서야 비로소 모든 고통과 갈등이 해소될 수 있소.· · · 그것이 반야(般若)지혜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은 반야지혜를 쓰라는 얘기요.· · · 하지만 반야를 아는 자도, 반야를 모르는 자도 반야를 얻을 수 없소. 반야가 어떤 것이라고 아는 자는 반야를 관념화했을 뿐, 그렇게 관념화된 건 지견이지 반야가 아니오. 이러한 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그건 이렇게 하라는 뜻이구나', '아, 그건 이렇게 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하고 제멋대로 알아들으면, 그것은 전혀 그 말뜻을 못 알아듣는 거요.



 만약 이 자리에서 하늘 아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긍정도 부정도 않고 그냥 볼 수 있다면,· · · 마치 커다란 둥근 거울이 세상 모든 것을 그냥 비추어내듯 그렇게 볼 수만 있다면, · · · 그렇게 그저 보는 그 행위만으로도 엄청나고 신선한, 대단히 놀라운 세계가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이오. 그건 여러분의 노력의 결과로 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래 갖고 있던 보배였던 거요. 그 보배를 쓸데없는 개념과 지식으로 온통 쓸어 덮었던 거요. 그러한 개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됐을 때, 우리가 개념과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점점 진실은 가려졌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는 거요.



 그러니 그게 무슨 걱정이었건 간에, 걱정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시오. 걱정이라는 것은 벌써 뭔가 싫다는 거요.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요. 그래서 어떻게 되긴 돼야 되겠는데 그게 잘 안 되니 걱정이 생기는 거요.· · · 그 어떻게 돼야 될 그것이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그 너무 당연한 그것이 바로 업장(業障)이오. 너무 당연하니까 그 함정이 안 보이는 거요.



 참으로 그 무엇도 어떻게 되어야 할 것 없이 일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되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이것도 저것도 전부 빈 말일 뿐이면, 어떻게 되어야 할 게 없으니 그땐 아무런 방편이 필요 없게 되는 거요. 그러니 지금 일승법(一乘法)이니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니 적조(寂照)니 해도, 여전히 어느 차원에 있어서는 그게 방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들었더라도, 어떤 한 마디도 그 말 자체를 기억해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벌써 그 맑디맑은 본 성품에 흠집 내는 거요.





 제3의 손으로 허공꽃 가꾸듯 하는 게 이 세상살이라는 걸 순간순간 잊지 않는 사람은, 판단해야 될 일에 직면해서 망설이는 법 없고, 일을 진행하면서 허둥거리는 법 없고, 끝난 다음에 후회하는 법 없이 항상 의연하고 당당하게 그냥 행동할 뿐이오.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인과(因果)의 분열'이오. 다시 말해 어떤 행동이 원인이 되어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가 나타났다는, 즉 이게 먼저고 저게 나중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중생은 항상 선택과 후회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소. 원인을 지으면서, '내'가 바라고 있는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선택을 항상 강요당한다 소리요. 그러니 늘 망설이고 눈치보며 요리조리 잴 수밖에 없소. 그러다 결과가 나쁘면 후회하고.· · · 과정과 결과가 둘이 아님을 잊지 마시오. 매 순간순간의 삶, 그 자체가 바로 결과요. 그게 바로 매 순간을 창조적으로 사는 부처 살림살이에 다름 아닌 거요.



 제3의 손으로 허공꽃 가꾸듯 한다는 것은, 하기는 하는데 실제로 하는 자가 거기 없다 소리요. 책임이니 의무니 강제 당할 '나'라는 실체가 본래 없는 거요.· · · 우리의 모든 삶의 흐름 그 자체는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없는, 어떤 절대한 우주적인 에너지의 작용일 뿐이지, 개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오. 행위의 주체가 없다 소리요.· · · 지금 이 순간 '나'라는 주체가 없다는 사실이 말로서가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당장 절대적이고 엄청난 자유의 문이 열릴 것이오. 그러나 그 자유의 문을 열기 위해서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 분석적으로 어떻게 해보려한다면, 점점 수렁 속으로 처박히고 마는 거요.



 이 우주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모든 작용은 그 바탕이 하나요. '나' 자신이 곧 이 세상이고, '나' 자신이 곧 이 자연인 거요. 그 참된 하나인 세계를 총체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늘 갈등과 혼란이 생기게 되는 거요.



 여러분이 만약 진실을 총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면, 이 세계가 몽땅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사실이 확연하게 실증될 것이오. 거기에는 그 어떤 대립도, 갈등도, 망설임도, 후회도, 선택도 없소. 전부가 하나요, 마음 이외에 한 법도 없는데, 뭐가 뭐를 선택하고 뭐가 뭐를 버리겠소?



 이런 말을 듣고 또, '후회하고 망설이고 허둥거리고 하지 않아야 된다는데' 하면 그게 벌써 병이오. 허둥거리거든, 내가 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자각하시오. 그 자각이 바로 가장 주의 깊은 상태요. 그게 바로 적조(寂照)요. 허둥거리고 있다고 이름짓지도 말고, 잘한다고도 하지말고, 잘못한다고도 하지말고, 순간순간 그렇게 보고 있으면, 그게 이른바 기억이 남지 않는 경험이요, 자취가 남지 않는 창조적인 삶이라는 걸 알게 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