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지(聖智)는 '앎'이 없으므로 '앎이 없음'이 없다.
  2. 법문(法門) : 그 무엇도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은 없다.
  3. 공안(公案) : 지금 <모르는 그것>이 바로 '부처'이니, 앎과 모름은 하나도 아니요,둘도 아니다.
  4. 게송(揭頌) : '참 앎'은 앎이 없나니· · · · ·
 
     
   
     
   

 늘 무언가 따지고 밝혀내어 이해와 설명이 가능해야 직성이 풀리는 범부중생에게는 '이해하면 틀린다'거나 '알아들으면 천 리 밖'이라는 등의 선사들의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이해와 설명이 안 되는 말들일 것이다. 그 중에는 그 말을 듣고, 그 참뜻을 깊이 참구하지 못하고 늘 하던 대로 '좋은 말씀'을 통째로 외워서 또 한 토막 지식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해하고 알아들으면 안 된다'고 또 다시 '알아듣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언필칭 이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앎이 없다고 '아는 사람'은 많아도 참으로 '앎이 없는 사람'은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 계속 걷어잡으려는 그 마음이 문득 쉬어, 이 법이 참으로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하는 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마침내 그 반야지혜(般若智慧)가 환히 밝아져서, 알고 모르고, 높고 낮고, 옳고 그르고 하는 항하사(恒河沙) 만큼 많은 모든 차별법을 한 순간에 몽땅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니, '반야무지(般若無知)의 도리'를 다음의 선사들의 말씀을 통해 깊이 참구하여야 할 것이다.





 ≪'반야'는 '있는 바 모양'이 없고, '생멸하는 모양'이 없다. 또한 '반야'는 '아는 바'도 없고 '보는 바'도 없다. 이것은 모두 '지혜'로 비추는 작용을 밝힌 것이니, 이는 '아는 바'가 있으면 '알지 못하는 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마음'은 '앎'이 없으므로 '앎이 없음'이 없나니, '앎이 없는 앎'이므로 '온갖 앎'이라 한다. 따라서 성인은 '마음'이 비었는데도 그것이 비추고, 온 종일 아는데도 일찍이 아는 일이 없다.



 하는 대로 따라 되어서 접대함이 그지없고, 그윽한 데마다 살피지 않는 일이 없으면서도 '비추는 공'은 없나니, 이것이 곧 앎이 없이 아는 바이다. 이것을 물건에 비유하면, 꽉 찼으면서도 있지 않고, 텅 비었으면서도 없지 않음과 같나니, 존재하면서도 논할 수 없음은 오직 '성인의 지혜'일 뿐이니라. 왜냐하면 그것이 '있다'고 말하려 하면 형상도 이름도 없고, 그것이 '없다'고 말하려 하면 거룩하면서 신령하기 때문이다.


  ◇ 거룩하고 신령하므로 <공허하면서도 '비춤'을 잃지 않고>,
  ◇ 형상도 이름도 없으므로 <비추면서도 '공허'를 잃지 않고>,
  ◇ 비추면서도 공허를 잃지 않으므로 <뒤섞여도 넘치지 않고>,
  ◇ 공허하면서도 비춤을 잃지 않으므로 <움직임으로써 거친 것을 접대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지혜'(聖智)의 작용은 처음부터 잠시도 중지된 적이 없으며, 그 '형상'은 애초부터 얻을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반야'는 공허하면서도 비추고 '진리'는 없으면서도 알며, 또한 '온갖 움직임'은 (움직임에)즉하면서도 항상 고요하고, '거룩한 감응'은 (感應이)없으면서도 항상 감응한다. 이야말로 알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알고, 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하는 것이니, 다시 '무엇'이 알겠으며, '무엇'이 하겠는가?



 성인은 <앎이 없는 '반야'>로써 <형상이 없는 '진리'>를 비추나니, 그러므로 '진리'는 털끝만한 의마(意馬 날뛰는 野生馬와도 같은 意識의 뜻)도 남김이 없고, '반야'는 다하지 않는 비춤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아도 어긋나지 않고, 맞서면서도 맞섬이 없으며, 고요하여 앎이 없으면서도 알지 않는 바가 없는 이(聖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