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구하고 성취하려는 마음이 망심(妄心)이다.
  2. 법문(法門) : 이 법은 전달하고 전달받을 수 있는 법이 아니다.
  3. 공안(公案) : 망상(妄想) 굴리지 말라.
  4. 게송(揭頌) : 그물을 벗어난 잉어는· · · · ·
 
     
   
     
   

 많은 사람들이 절에 가서 염불도 하고, 절도 하고, 독경도 하고, 또 때에 따라 다른 종교 집회에도 참석하고 기타 등등, 많이들 무언가를 하고 있소. 그런데 그러한 여러 가지 행위들의 목적은 모두 자신의 괴로운 심정이나 갈등 따위를 모면하기 위한 것이거나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소.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예외가 아니오.


 그것이 참선이 됐건, 독경이 됐건, 혹은 절하는 것이 됐건, 중생이 행하고 있는 수행 방편이 어떤 것이었건 간에, 그 뭔가를 얻기 위해서,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아무 공덕이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여러분이 뭔가를 얻기 위해서,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여러분은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오.





 대개사람들은 자기 자신한테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지혜를 밖에서 구해요. 누군가가 지금 '내'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답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요. 세속사(世俗事)를 통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면,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하나님이나 부처님한테까지도 기대요. 뭔가 다른 절대한 지혜를 갖고 있는, '나'보다 출중한 지혜나 힘을 갖고 있는 대상이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문제의 해답을 밖으로 구하러 다니는 거요.· · · 그러나 그렇게 방편에 의지하고, 타(他)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의타적(依他的)인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소.


 경전을 참으로 진지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부처님이 구절구절 도처에, '구하지 말라', '밖으로 구하지 말라', '모든 보배는 그대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느니라', '밖으로 구하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보살이 아니다' 등등, 비슷한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 거요.· · · 참으로 구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게 바로 부처요. 구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는 걸 알면, 이미 있는 그대로 부처요.


 많이 읽고 더듬거리며 그렇게 밖에서 찾고 있는 한, 여러분은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가 없소. 뭔가를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궁리해서 아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정작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데에 그것이 치명적인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소. '그래도 그렇지만 경전도 많이 보고 법문도 많이 듣고 해야지 그 속에서 뭔가를 깨달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오. 그러니 '많이 알면 멀어진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거요. 그게 바로 여러분이 스스로 지은 올가미에 걸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 · 그런 중생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빌 '공(空)'자를 그렇게 많이 쓰신 거요.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상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해요.· · · 깨달은 경지 그 자체는 절대로 설명되어질 수가 없고, 드러내 보일 수가 없소.· · ·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은 단지 뭘 알 수 있는가?· · · 여러분이 '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그걸 알고 있는 거요.· · · 무엇에 걸려있는가? 무엇의 장애를 받고 있는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진짜인 줄 알고 붙잡고 있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 그게 가짜라는 걸 알게 해주는 거요.


 그렇다고 해서 '그건 가짜고 이게 진짜다' 하고 버선목 뒤집어 보이듯이 그렇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법이 아니오. 그걸 말로 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 거요. 그건 머릿속으로 끌어들여 생각해낸 지견일 뿐이오.


 진리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그렇게 말로 표현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오. 그 자리는 말이나 생각으로 더듬을 수가 없소. 아무리 정교하고 완벽하게 설명해도 그건 둘째 자리요.· · · 이러한 말도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소리니, '아, 진리는 그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들으면 벌써 진리를 등진 거요.





 보통 뭔가를 전달하거나 전수(傳受)한다고 할 때,· · · 만약 무형문화재라면 장인(匠人)이 도제(徒弟)에게 자기가 갈고 닦아서 익힌 기술을 전수해 줄 수 있소. 즉, 서로 전수해 주고 전수 받고 하는 거요.· · · 그런데 가령 누군가가 깨달아서 그 깨달음을 전하려 한다고 칩시다. 그럼 우선 그 깨달음을 언어화해야 돼요. 깨달은 경지를 언어화해서 그것을 전달하는 거요. 그러면 전달받은 사람에겐 '들은 바'가 생기게 되고, 그 '들은 바'는 마음속에 심상(心象)을 낳게 돼요.· · ·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깨달음이 언어화되면 깨달음이 아니오. 깨달음과 깨달음에 대한 설명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깨달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뭔가를 전달한다는 게 전부 마찬가지요. '내'가 뭔가를 경험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경험을 언어화할 거요. 그러나 경험이 언어화되면 그 순간 이미 그 경험하고는 전혀 다른 게 돼버리는 거요. 경험이 이미지화 되면 벌써 경험이 아니오. 어떠한 경험을 언어화해서 전달한다면 그 사람에게 심상이 떠오를지 모르지만 그것은 처음의 그 경험이 아니오. 때문에 전달은 전혀 불가능한 거요.


 여러분이 묻고 내가 대답하고, 또 그에 대해 여러분이 생각하고 말하고, 앉고 서고 가고 오고 하는, 모든 순간순간의 경험 경험을 다른 사람한테 전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근본적인 착각이오. 언어를 통해 전달하고 전달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 소리요. 여러분이 뭔가 말을 듣건 사물을 보건 그런 것을 가지고 '이해한다' 하는 것은 과거 경험의 한 토막을 되살려보는 과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空)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그 말을 머릿속에 이미지화 해요. 이렇게 이미지화 된 것이 불가(佛家)에서 얘기하는 상(相)이오. '공상(空相)'이 생긴다 소리요.· · · 그리고는 모든 게 "'공'이다, '무(無)'다" 그러니까 그걸 추구하려 들어요. 추구하고 노력하려면 목표나 목적이 있어야 되죠? 즉, '공'의 실현이 목표가 되는 거요. '내' 마음에 '공'을 실현해야 되고, '내' 몸에 '공'을 실현해야 되고.· · ·


 흔히들 '공'이라 소릴 들으면, 텅 트이고, 무변광대 하고, 티끌 하나 없고, 가로거칠 게 없고, 무애자재 하고 등등,· · · 참 멋있게 잘도 그려요. 자기가 좋아하는 건 다 갖다 붙였으니 멋있을 수밖에.· · · 그리고 나서 이제 그러한 이미지를 추구하고 노력을 해요. 그 '공'을 경험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이거요.


 십 년 동안 토굴에도 들어갔다가, 삼 년 동안 땅에 등도 안 댔다가, 그렇게 신고(辛苦) 신고 하다가 무망결에 머릿속이 번쩍 하더니, 보니까 텅 트였어.· · · 자, 이렇게 되면 정신 없어요. 텅 트이고 티끌 하나 없고 무한한, 자기가 평소에 그리던 심상(心象)이 현현(顯現)됐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정신 없겠소? · · · 그리고는 '이제 한 살림 장만했구나!' 하고 쾌재를 불러요.· · · 이 정도 되면 이거 정말 골병이오. 뭘 장만해, 장만하긴?


 투영한다는 말이 그 말이오. 자기 멋대로 심상을 그럴싸하게 투영해 놓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그것이 현현됐다고 제 혼자 여기는 것뿐이오.· · · 그게 아무리 희한하고 대단한 것이라도 그건 여전히 제 마음속에 그려왔던 상이란 말이오.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은 제가 투영한 것을 붙잡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누가 뭐래도 옴짝달싹 안 해요.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게 '완공(頑空)'이오. 죽은 '공'이오. 여기에는 생명력도 없고 활동력도 없고 유연성도 민첩성도 탄력도 아무 것도 없소. 마치 불 꺼진 재와 같은 거요.


 지금 현존하는 불자(佛子)들, 이른바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참선을 하고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도달하는 '공'은, 백의 아흔 아홉까지 전부 '완공'이오.· · · 백이면 백, 다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법열에 젖어서 환희작약(歡喜雀躍) 합니다. '야, 드디어 내가 한 수 했어!'· · · 이리 되면 누구도 그 사람 못 말려요. 그래서 옛날부터 깨달으면, 깨달은 바가 있으면 병이 난다고 했던 거요.





 모든 게 비었고 허망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 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요. 모든 게 허망이라는 그 생각조차 모두 허망한 것이니 그 무엇에 걸릴 일이 있겠소?· · · 그래서 지금까지 내 마음을 압박하고 지배하고 통제하던 그 모든 장애가 다 제거됐을 때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참된 공(活空)이오. 아무 것도 거칠 것 없소. 적멸(寂滅) 그 자체요. 고요 그 자체인 거요.· · · 여기서 고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빌 공(空)'자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파리, 모기소리조차 안 들리는 적멸, 시끄럽고 혼란스럽지 않은 고요한 상태를 또 떠올리게 되는데, 이런 적멸은 죽은 적멸이오. 참된 적멸은 의식으로 포섭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거요.


 자기가 투영한 게 아닌, 아무 것도 투영하지 않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어떤 목표도 목적도 없는, 머리에 떠오르는 일체의 심상은 환(幻)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투철하게 깨달은 사람.· · · 말을 통해서건 문자를 통해서건 경험을 통해서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게 뭐건 간에 전부다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요, 환이라는 걸 투철히 아는 사람.· · · 지금까지 어떤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서 혹은 추구하고 혹은 배척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만 환영에 불과했다는 것을 투철히 깨닫고, 만법이 오직 유식(唯識)이요, 내 마음을 지금까지 지배하던 모든 갈고리, 인연줄이 전부 환영에 불과하다는 걸 투철히 깨달아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사람.· · · 이제 그 무엇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고 통제받지 않고 억압받지 않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서발장대 거칠 것 없는, 그런 마음이 되어진 사람.· · · 그 사람은 비로소 모든 것이 눈앞에 잠시 어른 거리는 허공꽃이라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는 눈이 밝아진 거요.


 눈앞의 모든 심리적 물리적 대상이 몽땅 허망인 줄 꿰뚫어봐서, 일체의 지배도 장애도 받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됐을 때, 내 본래의 생명력, 참으로 유연하고 활달자재하고 활기차고 탄력이 넘치는 내 본래의 청정자성(淸淨自性)이 저절로 드러나는 거요. 이것은 본래적인 것으로 절대 노력의 결과가 아니오. 자기가 투영해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의 보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소리요. 스스로 투영해서 강제로 얻은 죽은 고요함이 아닌, '나'에 의해서 증득되거나 경험되어지는 그런 것이 아닌, 본래적인 고요함이오.· · · 고요함을 경험하는 '나'가 있는 한, 그것은 참된 고요함이 아니오.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둘로 분열되어 있을 때에만, '고요하다'는 관찰의 결과가 나타나는 거요. 참된 고요함 속에는 이미 경험하는 자도, 기억하는 자도, 노력하는 자도 없소.





 일체의 장애가 제거되고, 그러한 사실을 '내'가 증득하면 벌써 어긋난 거요. · · · 인간의 정신은 자기가 기왕에 알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은 경험할 수가 없소. 자신이 기왕에 알고 있는 범위를 넘어설 수가 없다 소리요. 바꿔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기왕에 알고 있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고, 자기가 기왕에 알고 있는 것만을 찾을 수 있는 거요.· · ·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추구할 수 없고, 추구할 것도 본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오.· · · 이 본래적인 것은 여러분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거요.


 모든 걸 그냥 보시오. 이러쿵저러쿵 절대로 이름짓지 말고.· · ·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거기에는 관찰의 주체인 '나'는 없소. 활짝 열어놓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강물 흐르듯이 그냥 흘러 지나가게 두시오.· · · 그래도 아무 탈 없소. 그 모든 것은 전부 뜬구름 같은 것이요, 실체가 없는 거요. 그런 걸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실갱이를 해야 할 놈도 없고, 실갱이 해야 할 까닭도 없소.· · · 그냥 흘러가게 두시오. 경험하는 자도 환영(幻影)이고, 경험되어진 바도 환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