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함(爲)이 없고자 '하려는' 것이 미혹이다.
2. 법문(法門) : 조작하지 말고 흐름에 맡겨라.
3. 공안(公案) : 발우 씻은 때문도, 견해가 생김도 아니니 <본래 있는 성품>을 어째서 모르는가?
4. 게송(揭頌) : 오뚝이 일없이 앉았으니 봄이 오면 풀이 저절로 푸르르다.
 
     
   
     
   

 '나'라는 자의식이 생기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중심의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됩니다.· · · 아프다고 이름만 붙여도 이미 아픔으로부터의 도피과정이 시작되는 거예요. 안 아프려고 하는 갈등이 시작된 거라 소리요.· · · 그러니 고(苦)가 됐건 낙(樂)이 됐건 그것을 평가하거나 이름짓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맡길 수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해요. 고도 낙도 그저 날씨가 흐렸다, 개었다 하는 자연 현상과 다르지 않은 거요.

 어떤 장애를 만나도 물은 그냥 흐를 뿐이듯이, 우리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에 맡기고 그냥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오. 그러다 보면 일체의 울퉁불퉁한 차별 현상에 끄달리지 않는 참된 성품이 뭔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요.· · · 그렇다고 '흐름에 맡기라'는 말을, 손놓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듣지 마세요. 그런 소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매사에 '예전엔 어땠었는데', '이러면 좋을 텐데'하는 따위를 빼고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사세요.




 우리의 마음이 두 갈래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아픈 자'와 '아픔'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픈 자가 아픔을 자신한테서 떼 내려는 시도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는 거예요. 또 그렇게 해서 아픔으로부터 벗어난 '나'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지속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원적인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혼돈의 시작인 겁니다.

 본래 그 자리엔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없이 모두 참된 하나뿐이오. 이원성이란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 행여 '내'가 아프다고 말하지 마세요. 아프기는 아픈데 아픈 자가 없는 게 진실이오.




 바람은 그냥 불뿐이오. 그런데 우리는 '바람'이 '분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분다'고 하면 바람이라는 실체와 부는 작용이 두 가지 같지만 이게 착각인 거요. 그냥 불뿐이오. 부는 행위를 빼면 바람이 없고, 바람이 없으면 부는 작용도 당연히 없는 겁니다. 즉 '바람'이 '분다'는 말은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 언어의 이중 구조에 불과한 거예요. 결국 '바람이 분다'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바람이 분다'고 말하지만 바람하고 부는 작용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렇다고 수긍을 하지만, 정작 '내'가 아플 때는 '나'하고 '아픔'은 둘이라고 완강하게 고집을 합니다. 그래서 아픔을 떼 내면 안 아픈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즉 이 '나'라는 놈이 실제하고, 이 '나'가 불행했다, 행복했다 하는 줄 아는데· · · 그게 아닌 거요. · · · '나'라는 실체는 없소. 순간순간 모든 상황이 시절과 인연 따라 모양을 드러내는 것뿐이오.· · · 우리의 사고기능, 언어기능이 완전히 이원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됩니다. 그 이원성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전에는 절대로 진실을 알 수가 없어요.

 이원적 사고와 언어의 형식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우리 본래의 성품이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의 상태는, 일체의 이름도 개념도 붙을 자리가 아닙니다. 그 본래의 성품을 밝히게 되면 그건 무엇하고도 비교할 수가 없고 견줄 수가 없는 본래 온전한 거요. 모든 생각이 싹도 트기 이전, 그게 우리의 본래 성품이에요.




 본래 면목이니 본래 성품이니 할 때의 이 '본래'라는 말은 인간적인 차원의 어떠한 움직임이 있기 이전을 말하는 거요. 그래서 그 '깜깜하다(玄)'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해요. 그건 굳이 말로 하자면 사고의 흐름이 저절로 멈춰서 감정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거요.

 뭔가 모양을 보거나 소리를 들어서 홀리면 느낌이나 감정이 생겨나지요? 그렇게 나타나는 느낌은 전부 꿈같은 거요. 감정의 울타리, 소위 의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계속 흙탕물 속이오. '그 자리'에서 보면 모두가 꿈같고 허깨비 같은 건데 미혹하면 전부 실제 같이 여겨져서 헐떡거리게 되는 거요.

 좋고 싫은 모든 감정이 미혹해서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맑고 신령스러운 본래 마음에다가 왜 까닭 없이 탐욕이니 교만이니 불안, 초조 같은 감정을 불러들이겠소?· · · 입 한 번 뻥끗 해도 그 청정한 마음자리에는 흠집이 가고 때가 묻는 거요.

 그래서 그 본래의 마음 간직하기를 눈동자 간직하듯 하라는 소리가 있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황금가루도 눈동자에 집어넣으면 껄끄럽고 눈병이 날 뿐이오. 그와 같이 아무리 훌륭하고 신령스러운 거라도 마음에 받아들이는 순간, 그 마음은 흠집이 나는 겁니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문화와 문명, 그게 뭐가 됐건 그 청정한 본래 성품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소. 그 성품은 저 멀리 어디 높이 따로 모셔져 있는 게 아니오. 지금 여기서 이 말을 알아듣는 바로 이것이 그 성품이오.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소. 어떻게 알아듣는가 하는 그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오. 그저 알겠다고 알고, 모르겠다고 아는 그 앎이 있을 뿐이오. 그 빛은 한 시의 짬도 없이 늘 스스로 빛나고 있지만, 그 본 성품을 등지고 살아오면서 익힌 지식이나 경험, 말이나 생각을 앞세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고단한 거요.




 진리를 발견할 진지한 뜻이 있거든 지금껏 익혀온 모든 잣대를 꺾어버려야 합니다. 갖가지 지식이나 경험의 잣대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엄청나게 일그러져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요. 그렇다고 이런 질곡에 갇혀 있는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선지식들의 말씀만 추켜들고 다닌다면 그런 사람도 빛 보기 틀린 거요. 심지어 '마음 이외에 한 법도 없다' 는 것도 그 마음이 지어내는 말이오. 마음이 구르지 않으면 그런 말과 이름을 전개할 수가 없소. 그러니 이론을 전개해서 휘젓지 말고 그 이론이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요.

 온갖 법이 있다고 해도 '있다는 법'에 걸린 것이고, 없다고 해도 '없다는 법'에 걸린 거요.· · · 어떠한 개념도 붙여두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털끝만큼의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고 새기면 그게 벌써 개념이 된 거요. 긍정을 해도 부정을 해도 이미 그 자신이 받아들인 바를 되 굴려서 반응하는 겁니다. '반응하면 틀린다' 는 뜻이 아니라 그 말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면, 주인으로서 능히 쓰는 자리를 얻지 못한다 소리요. 자재하지 못한 거요.· · · 왜 그런가?· · · 이게 맞는 건가, 틀린 건가? 이게 옳은가, 그른가? 늘 걱정합니다. 맞니 틀리니 하는 것, 본래 근본 자리에는 그런 거 없어요.

 그러니 그 본래 영롱한 보배를 각자의 가죽주머니 속에 다 갖고 있는데, 남한테 기껏 묻고 들어봐야 둘째, 셋째 자리인 거요.· · ·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첫째 자리인가?· · ·

 붓다가 말씀하신 팔만 사천 법문 속에는 진리가 들어있지 않소. 담을 수가 없는 거요. 그 자리는 삼세제불(三世諸佛), 역대의 조사나 성인들도 혀를 댈 수가 없는 자리요. 부처님에게 있어서 더 나을 것 없고 무명 중생에게 있어서 더 못할 것 없는 그 본래적인 성품, 진리 그 자체는 일체의 개념과 상관없소. 일체의 개념이 붙는 자리가 아닌 거요. 거기서 한 번 구르면 미혹해서 참이니 거짓이니, 완전이니 불완전이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만족하건 만족하지 않건 모든 느낌은 미혹해서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해요. 여러분이 그 깜깜한(玄) 자리, 본래 한 생각도 일기 이전의 그 본래 자리를 발견하게 되면 만족 불만족 그런 거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목전에 나타나는 모든 산하대지 삼라만상을 보고 그게 전부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봐서 촘촘히 빽빽이 그렇게 간다면 어느 날 문득 그 근본 자리를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거요. 그러나 보고 듣는 족족 삐쭉삐쭉 실쭉실쭉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 나온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밖에서 찾을 게 없다는 뜻이오.

 팔만 사천 법문을 줄줄 외우고 모르는 말이 없다해도 전혀 소용없는 거요. 모든 말은 다만 진실의 세계를 제자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스승이 사용하는 언어적인 방편에 불과한 거지 그 말을 통째로 삼켜서 말을 배우고 또 그것을 공부로 안다면 성품 자리를 밝히긴 영영 틀린 거요.




 지식이나 언어, 개념은 전부 빈말일 뿐이오. 그걸 알고 써야합니다.· · · 진실과 언어는 전혀 다른 거요. 진실과 진실에 대한 설명은 전혀 다른 것이라 소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진실을 그럴싸한 언어로 치장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지어간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소.

 만약 언어에 사실적인 의미가 있다면, 배고파 죽을 지경인 사람이 '나는 배부르다'고 하면 배가 불러야 되요. 억지 같은 말이지만 지금 우리의 언어가 그런 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 때문에 다툴 일이 없는 거요. 말은 그냥 메아리 같은 거요. 새소리 물소리처럼 그냥 소리일 뿐이오. 다만 메아리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그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오.· · · 그건 터무니없는 겁니다. 그 언어의 굴레에서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것이 가장 일차적인 문제요.

 모든 모습 보기를 아지랑이 보듯 하고, 모든 소리 듣기를 메아리 듣듯 하라는 말을 그래서 하는 거요. 미혹한 중생이 일차적으로 해방돼야 될 것이 그 빛깔과 소리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 · 그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살 수 있겠소?· · · 모든 게 지금 있는 그대로 온전한 거요. 조작하려 들지 마세요.




 대개 자기 자신이 옹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 너그럽고자 노력하지요?· · · 그게 대립이고 갈등이오. 만약 우리 마음이 아무런 가치체계나 논리체계가 없이 그야말로 허공처럼 완전히 비었다면 왜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말, 행동을 그렇게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겠소?

 지금 문제는 우리의 가치체계나 논리체계가 얼마나 완강하게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속박하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오.· · · 마냥 왜곡되고 뒤틀리고 얼룩져 있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자꾸 세상사를 평가하고 해석하지 마세요. 계속 그러고 있는 한 갈등밖엔 없소.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말, 행동을 비난하지 않는 거요. 스스로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거요. 순간순간 조작합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들여진 거요. 심지어 법문을 듣는 것조차도 앞으로의 행동 지침을 삼으려고 듣소.· · · 인간은 본래 행동하는데 어떠한 지침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지침을 필요로 하는 행동은 기계적인 행동이오. 그것은 창조적인 삶이 아니라 소리요.




 우선 우리 마음이 무엇에 의해서 붙잡혀 있고 속박 돼 있는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헛손질이 나가요. '아이고, 그러면 안 되는데· · · ' 하고 얼른 억압하거나 도피하려 듭니다.· · · 억압하고 도피하려 하거나 혹은 찬양하는 일체를 하지 않고 '그냥 볼 수는 없겠는가?'· · · 그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거요.

 찬성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고 볼 수 있는 마음은 대단히 침착하고 성숙하고 거의 무한한 포용력이 있는 마음이오. 그게 뭐가 됐건 모든 것을 그냥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돼 졌을 때, 그때 비로소 여러분한테 해탈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요. 그 길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소.




 절대로 비난하지 말고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을 그냥 보세요. 물론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찬양하지도 마세요. 긍정적인 상황이 나타나면 대개 쌍수 들고 환영합니다. 얼씨구절씨구하면서.· · · 부정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그걸 모면해 보려고 더 시끄럽소. '나 죽는다'고 아우성이오.· · · 절대로 이름짓지 말고 그냥 보시오.

 잘 생각해 보세요.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건 전혀 힘든 일이 아니오. 어떻게 되라는 것도 아니고, 되지 말라는 것도 아니오.· · · 그런데 그게 또 잘 안 된다고 하소연이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또 먼지를 피운다 소리요.

 이 '나'를 갈고 닦아서 내가 지향하는 아주 위대하고 대단한 경지에 '나'를 이끌어 올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로 들으면, 그 사람은 계속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거요. 목표를 추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냥 본다면 끊임없이 비판적인 자세가 될 수밖에 없소. '나'가 없는데 누가 그런 생각을 가지겠소?




 문을 활짝 열어놓고 모든 알록달록하고 천차만별의 모든 감정의 흐름이 내 마음 한 복판을 꿰뚫고 그냥 흘러 지나가도록 하세요.· · · 이해하고 따지고 알려고 하지말고.· · ·

 대개 '에이, 또 혼란스러워졌어', '또 끄달렸어', '에이 틀렸어' 그러기 십상이오. 그건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오.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는 보는 자가 없소. 보는 자가 있으면 잣대가 생기고, 그래서 옳고 그름을 분석하고 평가하게 되는 거요.· · · 관찰자는 없소. 그냥 환히 비출 뿐이오.

 이게 너무 쉬운 말이어서 어렵게 들리는 거요. 그건 내가 하는 말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지금까지 우리가 하던 버릇이 꼬여있어서 그런 거요. 그냥 살라고 해도 자꾸 어떻게 하려고 들어요. 물이 흐려졌는데 어떻게 하면 맑아지느냐 하는 게 우리의 주제요. 그런데 자꾸 저어요. 이렇게 저어서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저렇게 젓고 또 이렇게 젓고· · · 내 하는 얘기는 그게 흐렸건 맑았건 그냥 두라는 겁니다.




 그저 흘러가게 놔두세요.· · · 이 말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또 어떻게 하려한다면 이미 빗나간 거요.· · · 절대로 저항 따위는 하지말고 그냥 흐르세요. 그럴 때 이 우주적인 에너지가 곧 '나' 자신인 걸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