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함(爲)이 없고자 '하려는' 것이 미혹이다.
2. 법문(法門) : 조작하지 말고 흐름에 맡겨라.
3. 공안(公案) : 발우 씻은 때문도, 견해가 생김도 아니니 <본래 있는 성품>을 어째서 모르는가?
4. 게송(揭頌) : 오뚝이 일없이 앉았으니 봄이 오면 풀이 저절로 푸르르다.
 
     
   
     
   

 "이렇게 하라". "그렇게 하지 마라".· · ·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받아온 교육이라는 이름의 '훈육 방식' 때문에, 중생은 늘 어떻게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싸여 살아간다. 표면적으로는 거부한다 하면서도 막상 일정한 제도와 규율 속에 놓이거나 안주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려워지기까지 하는 게 중생의 모습이다.

 이러한 두터운 습(習) 때문에 부처님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 역시 선지식과 경전의 많은 말씀을 모두 '어떻게 하라'는 또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무위(無爲)요, 무작(無作)임을 들으면서도 함이 없고자 '하고', 지음이 없으려고 '짓는다'. 이러한 현상은 '이다' 아니면 '아니다' 일 수 밖에 없는 이분법적인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둘 다 아니라는 선지식들의 말씀을 들으면 당혹해하기 십상이다. 그리곤 지금껏 받아 간직해온 지식과 지견들을 총동원하여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여 받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궁리를 '하고', 또 다른 지견을 '짓는다'.· · · 무위무작(無爲無作)이라는 단 한 마디 말을 들으면서도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많은 '함'과 '지음'이 있는지 자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 · 그동안 켜켜로 쌓아온 지식과 지견에 의해 해답이 구해지지 않으면 결국 "그러면 어찌 '하란' 말인가?" 라는 너무도 '자연스런' 의문을 갖는다.

 무위(無爲)를 들으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향해 마음이 내닫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참 성품'은 이미 온전하여 인간의 사량과 분별이 미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무위(無爲)를 말하고 무작(無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하려고' 밖을 향해 내닫는 그 마음을 우선 근원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몰랐다면 모르려니와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다면 어찌 그 마음이 계속 경계를 향해 준동(蠢動)하는 것을 방치하겠는가? 여전히 자신의 지식과 지견을 잣대로, 늘 굴려온 상식 수준에서 고인(古人)들의 말씀을 대한다면 그를 어찌 참된 본분납자(本分衲子)라 할 수 있겠는가?

 고인들이 드러내 보이고자 했던 뜻은 결코 말의 내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사용된 그 유한하고 어중간한 말꼬리를 붙잡고 "그렇다면 이래야 하지 않는가? 저래야 하지 않는가?" 하며 계속 지견의 수렁 속에서 벌이는 자맥질을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한다.· · · 참으로 삼가고 조심스런 길이다.



 대법거경(大法炬經)에 이르기를,· · ·

 『진정한 열반(涅槃, 無爲 無作 無生의 境地)은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요, 사람이 지어낸 바가 아니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참 열반'이란, 온갖 세간(世間)과 '있음'과 '없음' 까지이니, 이 모두를 지금 있는 그대로 열반이라 한다. 만약 상(相)을 취착하여 염정(染淨)이나 동정(動靜)을 분별한다면 이는 열반이 아니니, 만약 한 법이라도 '서로 다르다'고 본다면 이는 마음 뿐인(唯心)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잃으므로 '악마의 일'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경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함이 없음'(無爲)으로써 이름을 얻고, '원만한 수행'은 '지음 없음'(無作)으로써 행(行)을 이룬다"고 하였다.· · · 듣고 보는 대로 순식간에 지견의 칼을 휘둘러 하나의 참된 성품을 수도 없이 난도질하는 습이야말로 이 길을 가는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할 일이니, 참으로 온갖 법이 비었음을 분명히 알아서 그 사납게 날뛰는 마음이 잦아들어야, 그 때 비로소 함이 없이 하고, 지음 없이 짓는 자리를 밟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