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없음>을 증득하는 것은 누구인가?
  2. 법문(法門) : 한 찰나 전의 '나'는 한 찰나 뒤의 '나'가 아니다.
  3. 공안(公案) : 몸을 빼건 벗어나건 더욱 '자기'를 미할 뿐이니, 금으론 금을 바꿀 수 없다.
  4. 게송(揭頌) : 모든 법은 체성도 작용도 없어서 온갖 것은 서로 알지 못한다.
 
     
   
     
   

 '나' 있다, '나' 없다 하는 말을, 우리는 도깨비 방망이 딱 치면 '내'가 사라지기도 하고 생겨나기도 하는 그런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그게 바로 '나'를 관찰의 주체로 인식하는 데서 오는 미혹이오. '나'와 대상, 그 모두가 다 한 마음뿐인 거예요.
 그 마음의 어느 단편이 한 순간 인식의 주체가 되어버리는데, 그게 바로 '나'라는 생각의 출발인 거요. '나'를 인식의 주체로 삼아버리는 것은, 우리 범부들이 마음의 총체적인 구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기 때문이오.



 우리가 이 세상 살려면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지요? 산다는 게 결국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 이 모두가 관계인데, 이 관계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 거요.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일차적인 것이 바로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관계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관계를 우리가 지금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해야만 보는 자인 '나'하고, 보이는 대상 사이의 관계가 모두 한 바탕, 즉 한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요.


 모든 관계, 좋은 인연이 됐건 나쁜 인연이 됐건 그게 전부 이 견분과 상분 사이에서 생겨나는 착각현상인 거요. 주체와 객체, 이게 근본이 하나인데 전부 분열되어 대립관계를 이룬다 소리요. 이 관계에 대한 이해가 총체적으로 명료해지면, 모든 진실은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있을 뿐이지, 새삼 관계라고 할만한 게 없는 거예요.


 관찰의 주체도 없고, 관찰의 대상도 없는 관찰이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게 도대체 어떤 걸까 하고 궁리를 합니다. 이럴 때 그걸 상상하는 건 전혀 무의미해요. 거기에 대해서 뭔가를 알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거요. 노력을 하면, 노력하는 자하고 노력의 대상이 또 갈라지죠?· · · 결국 이 이원성(二元性)은 끝내 해소가 안 되는 겁니다.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으면 곧 정각을 이룬다 했소. 결국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분열상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내'가 뭔가를 경험했다고 여기면서 자기를 주재자(主宰者)로 세우는 거요.


 모든 인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오. 그게 바로, '물질을 보거든 네 마음을 보는 줄 알라' 고 말한 이유입니다.· ·  · '내가 뭔가를 봤다', '내가 뭔가를 경험했다' 하는 그 '나'가 있는 한, 다시 말해 자기 몰락이든 자기 부정이든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가 있는 한, 이 '나'라고 하는 그 놈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  · 자아라는 것은 미(迷)한 정신에 의해서 빚어낸 가공적인 거요, 실체가 없는 겁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나'라는 중심을 가지고 흐를 때와, 어떤 중심도 없이 완전히 개방되었을 때의 차이를 알 수 있겠어요?· ·  · 쉽게 얘기해서 '나'가 있을 때는 요만큼 썼는데 '나'라는 어떤 유한성에서 해방되면 총체적으로 무한한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게 거듭나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자기 자신의 과거 기억이라든가, 경험, 지식 따위에 의해 속박된 마음만 쓰고 있다는 걸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고 보면, '나' 없는 경지를 추구한다는 말처럼 잘못된 말이 없어요.· ·  · '나' 없는 경지를 누가 추구해요?· ·  · '나'가 없으면 그만이오. '나'가 없으면 그만이지, 누가 '나' 없는 경지를 또 추구한단 말이오?· ·  · 그러니 '나' 없는 경지를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는 거요. 그저 툭툭 터세요.
'나' 없는 경지를 증득할 가능성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따위의 아무런 의견도 가지지 마세요. 내가 지금 '나' 없는 경지에 도달했나 안 했나 하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나' 없는 경지를 상상하지도 마세요. '나' 없는 경지를 이해하려고도 하지말고, '나' 없는 경지를 짐작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모든 게 죄다 비어서 한 물건도 없다고 여기지 마세요. 보이고 들리는 족족 전부 다 그 '참 성품'이오. 바닥을 사무치고 나면, 되돌아서 어느 것도 '나' 아닌 게 없는 거요. 그러니 "의식이 활동하고 있는 한 '참 나'를 볼 수 없다" 하는 그런 말을 또 짊어지고 다니면서, 지견으로 삼고, 해석을 해서, 그 의식을 다시 지우려는 일 또한 하지 마시오. 의식이 본래 실체가 없는 거요. 본래 없는 건데 지우려고 하는 것은 거울의 그림자를 지우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빈 건 줄 알면, 지우고 말고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리될 때 하늘 땅 삼라만상에 대한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려요.· ·  · 결국 '나'라는 이 존재를 통해서 우주가 그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가 짓는 대로 나타나는 거요. 우리가 뭔가 자꾸 없다 그러고 빈 거라 그러는 이유는, 이 대상을 실체로 알고 속고있기 때문에 그 현혹에서 깨어나라 하는 얘기지, 없어서 없다는 얘기가 아닌 겁니다. 실체가 없다 하는 건 없어서 없는 게 아니고, 그림자같이 작용한다는 이야기요.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다 그림자 놀음놀이인 거요. 다만 우리가 그걸 개별적인 실체라고 인정해서 현혹됐던 것뿐이오. 지금까지는 내가 지은 것을 내 마음의 나툼인 줄 모르고 실체인 줄 알고 거기에 홀렸는데, 알고 봤더니 그게 '나' 스스로의 나툼 아니겠소?· ·  · 그게 깨는 거요. 그 때 비로소 눈이 밝아지는 거요. 그리 되면 이제 의식에 현혹되는 게 아니고, 되돌아 의식을 쓸 수 있게 되는 거요. 그렇지 않게소?· ·  · 그게 바로 "백 가지 풀 끝마다 조사의 뜻이 서리었다"고 한 이유요.



 여러분이 주워들은 게 있어서 '생각이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다' 하고 알아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일어나는 생각마다 투쟁이오. '생각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다니, 생각이 고개를 내밀기만 하면 주리를 틀어버리겠다' 하고 작정하면, 그 이후론 순간순간이 싸움이오. 생각이 한 순간도 쉬어본 적이 없으니 매 순간이 지옥인 거요.
 '생각의 일어남'을 그냥 '하나의 사실'로 보세요. 거기에 이름을 지을 것도 없고, 해석할 것도 없고, 설명을 할 것도 없고, 아무 의견도 붙이지 않고 그냥 볼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문제 거리가 되질 않소.
그 '사실'을 봄으로 해서 내 마음 속에 고개를 추켜드는 낡은 기억의 잔재가 문제를 만들어내는 거요. 아무 것도 끼워 넣지 않고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본다면, 그게 생각이 됐건 사건이 됐건, '나' 있건 '나' 없건,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거요.


 중생들에게는 이러저러한 문제가 참 많아요. 삶의 구석구석이 문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거요. 여러분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문제에 직면해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문제를 풀려고 애쓰고 있는데, 과연 문제를 푼다는 게 무슨 뜻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오.· ·  · 연구하고 궁리해서 그 문제로부터 어떻게 하면 재주 좋게 도피할 수 있는가, 그거 아니오?
 대개 문제는 부정적인 거죠? 한 마디로 문제는 괴로운 거요. 근데 뭔가를 괴롭다 싫다 두렵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대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는 게 아니고 도망을 쳐요.· ·  · 우리가 아주 침착한 마음과 큰 포용력을 가지고 있을 때라야만 그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가 있소. 아무리 큰일을 당해도 아주 침착한 마음으로 대하고 보면 별 거 아닌 경우가 많소.· ·  · 그런데 어때요? 당했다 싶으면 벌써 혈압이 올라가고, 얼굴은 노랗게 되고 그렇소. 그러면 작은 일도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게 마련이오. 한 숨만 푹푹 나오고, 잠도 잘 안 오고.· · · 결국 문제 거리만 더 늘고 눈덩이처럼 더 커져버린 거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선 일차적으로 원인 규명을 하게 되요. 이 문제가 왜 생겼는가?· ·  · 근데 이건 벌써 '이 문제가 싫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거예요. 이 사람은 벌써 꽁무니 빼고 있는 거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원인이 뭔가,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벌써 싫다고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완전한 이해가 생길 수가 없소.
 '내가 싫다'에서 출발하면 문제를 똑바로 볼 수가 없소. 좋고, 싫고 하는 게 전부 이 '나'때문에 생기는 거 아니오?· · · 어떠한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거요. 우리 마음에 '나'라는 중심이 없으면, 절대로 좋고 싫고, 마땅하고 마땅치 않고 하는 역·순은 안 생깁니다. 역정(逆情), 순정(順情)이 안 생겨요. '내'가 있음으로 해서 역·순이 생기는 거요.


 왜 우리는 어떠한 '사실'을 그저 하나의 '사실'로 볼 수 없게 됐을까요?· ·  · 그게 다, 있지도 않은 '나'라는 가공적인 환상을 만들어 놓고, 그 놈의 붓 대롱을 통해서 보니까 모두가 문제로 보이는 것뿐이오. 총체적으로, 통괄적으로 활짝 열어놓고 본다면, 이 세상에 문제는 없소.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옳은 거요.


 보고 듣는 가운데 망심, 망상 일어나지 않으면 상지상(上之上)이오. 그렇다고 망심, 망상이 일어났으니 틀렸다고 애태우지도 마시오. 왜 그런가?· · · 애태우는 것도 망심, 망상인데, 왜 또 망심, 망상 가지고 걱정을 하며 망상을 굴리겠소.· ·  · 망심, 망상은 빈 거요. 꿈같고 허깨비 같은 거요.· ·  · 망심, 망상이 일어나도 더 이상 속상해 하지 않게 됐다고 해서 좋다고도 하지 마시오.· ·  · 이게 있는 그대로 보는 거요. 뭐든지 있는 그대로 보세요.


 보는 '나'가 없소. 그냥 보는 거요.· · · 감정이 일어났거든 그 감정을 그냥 보시오. 생각이 일어났거든 생각을 그냥 보고.· ·  · 맞는 생각이니, 틀린 생각이니 하면서 문제 거리로 삼는 건, 그 동안 보고 듣고 읽고 해서 알아들은 게 너무 많아서 그런 거요.
 생각이 살풋 일어나면, '아이구, 생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데, 생각이 모든 문제를 지어내는 원흉이라는데, 생각이 또 일어났어. 그러니까 나는 틀렸어· ·  ·' 하면서 의견을 말아내지 말고, 그냥 그런 사실이 그렇게 있구나 하고 그냥 보세요.



 인간의 능력이라는 게 본래 이 개체에게 능력이 있는 게 아니오. 이 몸은 실체가 없는 거요. 그런데 이놈을 '나'로 삼고, 이놈을 이롭게 하고 안정되게 하려고 이놈이 기를 쓰니까, 삐그덕 거릴 수밖에 없는 거요.
 다들 '내'가 이렇게 노심초사해서 번 돈으로 '내'가 먹고 '내'가 입고 '내'가 쓰고 산다고 생각하지요?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뼈골 빠지게 일해서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사는데,· ·  · 그러지요?
 '나'라는 개체가 본래 없는 거요. 그건 미(迷)한 마음이 지어낸 가공적인 환상이오. 모든 것을 우주적인 흐름 그 자체에 완전히 맡겨버린 사람은,· ·  · 맡겨버렸다는 것도 억지로 하는 소리요. 맡길 것은 뭐고 맡아주는 사람은 뭐겠소? 어쩔 수 없어 하는 말이오.· ·  · 완전히 맡긴 사람한테는 근심이니 걱정이니 하는 게 없소. 뭘 따로 준비할 게 있겠소? 그때그때 손에 닿는 대로 쓰면 되는 거요.
 그럼 또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이 두 손 놓으라는 소리로 들을 게 뻔해요. 누가 놓으랬소?· ·  ·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두 손 놓겠다고 하는 건 여전히 망상을 굴리는 거요.· ·  · 지금 하는 게, 제가 하는 게 아닌 거요. 아무 생각없이 그냥 해요. 그걸 '내가 한다' 그러지 말고, 그냥 하라 소립니다.



 맨 처음 한 걸음이 없으면 천 걸음도 없소. 그렇다고 해서 천리 길을 다 갔을 때 맨 처음 한 걸음이 함께 있는 건 아니오. 그거나 마찬가지예요. 이 '나'라는 놈이 실체가 있어서 여러 과정을 거친 후에 여기에 온 게 아니오. 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게 없었던 것도 아니오. 그럼 없었던 것도 아닌데 오지도 않았다면,· ·  · 결국 아무 것도 옮긴 것이 없다는 소리요. 불천(不遷)이오. 옮긴 게 없어요.· · · 이 세상에 그 뭔가가 옮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소. 그리고 그 어떤 실체가 지속되는 것도 없소. 찰나찰나 끝나는 거요. 우리의 바로 앞의 생각은 바로 뒤의 생각이 아니오.


 여러분이 아까 집을 떠나 걸어오면서 걸음 옮겨 디딜 때마다 순간순간 다른 '나'요. 집에서 떠날 때의 '내'가, 지금도 계속 여기 있다고 여기지 마시오. 이 진실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나'라는 자취가 사라지는 거요. 바로 한 찰나 전의 것은 한 찰나 뒤의 것이 아니오. 그러면 변화라는 건 뭐요?· ·  · 착각 때문에 생겨나는 거요. 순간순간 다른 거요.
 순간순간 다른 '나'가 새삼스레 무슨 여행길을 또 떠나서, 장차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뭘 자꾸 준비하겠소? 순간순간 다른 '나'인데, 누가 성공하려고 애쓰며, 누가 대단하게 되려고 애쓰며, 누가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겠소?· ·  · 다른 '나'요, 전부다. 어떻게 되어야 할 '나'는 없는 거요.
 그러니 아랫다리 후들후들 할 일이 없는 거요. 이럴 때 여러분이 참으로 진지하다면, 더 이상 토를 달 군더더기가 없을 거요. 또 다시 뭐에 끄달릴 일이 있겠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