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없음>을 증득하는 것은 누구인가?
  2. 법문(法門) : 한 찰나 전의 '나'는 한 찰나 뒤의 '나'가 아니다.
  3. 공안(公案) : 몸을 빼건 벗어나건 더욱 '자기'를 미할 뿐이니, 금으론 금을 바꿀 수 없다.
  4. 게송(揭頌) : 모든 법은 체성도 작용도 없어서 온갖 것은 서로 알지 못한다.
 
     
   
     
   

 불자(佛子)치고 <'나' 없는 도리>를 깨쳐야 한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의 참뜻을 알아차리고 문득 회심(廻心)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태어나면서부터 워낙 생사법의 틀에 갇혀 살아온 터라 이 말을 들으면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현재의 <'나'가 있는 상태>를 앞으로 수행을 통해 <'나'가 없는 상태>로 바꿈으로 해서 깨달음의 자리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언뜻 별 허물이 없어 보이는 생각 같지만, 많은 수행자들이 숱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서도 그들의 공부에 진척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이와 같이 생사법의 테두리를 맴돌며 첫 단추를 잘못 꿴 그 생각에서 비롯된다.



 옛 선인들의 말씀에,· · ·  
 △ '나'가 실제로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이것이 <범부의 소견>이요,
 △ '나'라고 할만한 '나'가 없다고 알아서 '무아'(無我)의 자리에 머물면 이것은 <이승(二乘)의 소견>이요,
 △ '나가 있음'도 아니고, '나가 없음'도 아니고, 이 양변이 다 아니라는 것도 아니라고 알면 이것은 <보살의 소견>이요,
 △ <부처 자리>에서 보면 이 모든 소견이 다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그 어느 것도 부처 지혜의 나툼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나'가 없는데 <'나'가 있는 상태>를 <'나'가 없는 상태>로 바꾸기 위해 수행하는 자는 누구이며, 궁극에 그 깨달음의 자리에 이르는 것은 누구이고, 또 그와 같은 사실을 아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 ·

 마음이 그대로 법(法)이고,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나'를 포함한 일체 삼라만상이 오직 <하나의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인 '한 마음'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의 성품(自性)은 본래 스스로 온전하여 가고 오고 하는 일이 없고, 머무는 일이 없으면서도 본래 온갖 곳에 두루해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드러난 형상만을 좇으면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에 집착하여 아집(我執)에 사로잡힌 사람과 무아(無我)의 경지를 깨쳐서 초연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무아(無我)란, <나 있음>과 <나 없음>의 양변이 가지런한 곳에서 그 뜻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 ·
≪만약「내가 '무아(無我)'를 알았다」하거나, 또는「내가 '무아'를 증득했다」고 한다면 이는 '무아'를 허무는 것이 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거기 능·소(能所)가 있기 때문이다.
 <아(我)와 무아(無我)가 둘이 아닌 것>이 이 '무아'의 참뜻이니, 이 '무아의 법'(無我法) 가운데 '참 나'(眞我)가 있는 까닭이다.

 보살마하살이 이미 견성하여 마치매, 모두가 말하기를,· · ·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한량없는 생사에 유전(流轉)하면서 항상 <'무아'(無我)의 혹란(惑亂)한 바>가 되었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본래 '법성'(法性) 가운데서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가 둘이 아니요, '삼매'(三昧)와 '번뇌'(煩惱)가 본래 평등하거늘, 보살이 이 '성품의 이치'(性理)를 깨치기 전에는 늘 '무아'에 집착하여, 치구심(馳求心)이 오히려 쉬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