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은 '봄'이 아니다.
  2. 법문(法門) : '본래 마음'은 인식작용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3. 공안(公案) : 이 '몸'과 '마음'은 모두가 '참 마음' 위에 나타난 그림자이다.
  4. 게송(揭頌) : '심성'은 나지 않거늘 어찌 알거나 보려고 하는가.
 
     
   
     
   

      '심성'(心性)은 나(生)지 않거늘
     어찌 알거나 보려고 하며
     본래부터 한 법도 없거늘
     누가 닦아 익힘을 말하랴.

      눈앞의 세상사가 '허공'과 같거늘
     알려는 곳에 '종지'(宗旨)를 미혹하고,
     분명히 뭇 '경계'를 비치거니와
     '비침'에 따라 캄캄해진다.

      마음을 써서 <고요함을 지키면>
     여전히 병을 여의지 못한 것이니,
     생사의 생각조차 잊어야
     그것이 '본성품'이다.

      눈앞에 물건이 '있으면'
     물건 '없음'이 완연한 것이니,
     지혜로써 살필 필요도 없이
     '본체'는 본래부터 비고 현묘(玄妙)하다.

      또렷또렷하되 허망함이 없으면
     적적하면서도 환히 밝아서
     만상이 항상 참되고
     삼라(森羅)가 '한 형상'(一相)이리라.

      '보리'는 본래부터 있으니
     얻고 지키고 할 필요가 없고,
     '번뇌'는 본래부터 없으니
     이제 새삼 없앨 필요가 없다.

      '근본의 경지'는 깊고 깊어서
     마음으로 궁구(窮究)할 바가 아니니,
     '바른 깨달음'(正覺)은 '깨달음'이 없고
     '참된 공'(眞空)은 '공'이 아니다.

      나(生)도 나지 않는 줄 알면
     눈앞에 항상 머무르나니,
     지혜로운 이라야 한다.
     말로써 깨달을 바가 아니다.

 

   ― 심명(心銘)중에서, 법융(法融, 牛頭山 初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