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은 '봄'이 아니다.
  2. 법문(法門) : '본래 마음'은 인식작용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3. 공안(公案) : 이 '몸'과 '마음'은 모두가 '참 마음' 위에 나타난 그림자이다.
  4. 게송(揭頌) : '심성'은 나지 않거늘 어찌 알거나 보려고 하는가.
 
     
   
     
   

 여러분이 질문하는 걸 보면, 대개 그 원인과 답까지도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계속 불편한지, 내가 왜 쉬지 못 하는지· · · 원인까지도 다 알아요. 그런데 그 원인을 알아서 그 원인을 해소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서 놓여난다는 그 구조가 만약 옳은 거라면, 우리 인류는 벌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어야 맞아요.· · · 원인을 알아서 원인을 제거함으로 해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우리가 상대세계에서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난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고통이 지금 싫지요? 고통이 싫어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요? 그래서 설사 그 노력이 이루어졌다 해도, 그 자체가 상대적인 거요.· · · 이쪽저쪽이란 말입니다. 계속 이쪽저쪽이에요. 우리 세계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 거요. 그 싫어하는 내용이 뭐였건 상관없이 뭔가를 지금 싫어한다는 건 그와 반대되는 것을 희구한다는 얘깁니다. 이게 소위 이원성이오. 그게 지금 둘로 갈라져서 사단이 난 겁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 여여한 마음에는 둘로 갈라진 요소라는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감각기능, 인식기능이 생기면서부터 인식의 주체를 세우고 인식의 대상을 세우는 그런 버릇이 생긴 거요. 그렇게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마음이 둘로 갈라진 겁니다. 본래 '한 마음'은 인식의 주체니 객체니 하는 두 법이 없는 거요.
 우리는 본래의 마음을 몰라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본래 마음'을 알았다 하면 그건 이미 본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본래의 마음이 어떤 거라고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것은 이런 것이다', '과거에 내가 알았던 그 어떤 것하고 같은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머리에 떠올라야 돼요. 그러나 본래의 마음은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나에 의해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고, 나의 모든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그 본질입니다.
 여러분, 영화에는 카메라가 안 나타나죠? 카메라로 영화를 찍지만 카메라는 카메라 그 자체를 드러낼 수가 없잖아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면, 우리 '본래 마음'이라는 게 나에 의해서 인식되어질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우리의 모든 지각 작용, 그게 멍청한 지각작용이건 똑똑한 작용이건 모든 지각 작용의 본질, 근원이 우리의 '본래 마음'인 거예요.

 따라서 '본래 마음'은 절대로 추구할 수가 없어요. '본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의미가 없다 이런 얘기요. 추구하는 것은 '본래 마음'이 아니고, 그 '본래 마음'이 두 번 세 번 굴러서 그럴싸하게 여겨지는 어떤 심상이요. 내가 그린 어떤 이미지, 이상.
 '본래 마음'은 우리가 추구할 수도 알 수도 없어요. 설명할 수도 없고 알아보려고 해도 소용없는, 시간 공간을 넘어선 존재입니다. 왜 그렇겠어요?· · · 우리의 생각이 굴러서, '본래 마음'이 굴러서 시간개념이니 공간개념이니 자아개념이니 하는 게 생긴 거요. 우리 인간이 개발해낸 어떤 이론도 넘어서 있어요. 우리 인간이 구성해낸 어떤 가치 척도에도 걸리지 않아요. 가치관을 넘어서 있다 소립니다. 그건 완전히 본원적인 걸 말하는 거요. 그게 우리 '본래 마음'이오. '본래 마음'은 지혜롭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아요.
 본래적인 거는 어디서 얻는 게 아니고,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이 몽땅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래서 그 허망한 마음을 따라가지 않으면, '본래 마음'은 늘 항상 거기에 있었던 거라는 걸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본래적인 마음은 온 누리에 두루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스스로를 고립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나하고 너가 엄연히 다르게 보이지만, 우리의 본래 성품, '본래 마음'은 온 누리에 두루해서 모든 이런 것과 모든 저런 것이 시공을 초월해 몽땅 한 뿌리요, 한 성품인 겁니다.

 우리가 지금 마음을 공부하기 때문에 편의상 '본래 마음'이라고 하지만, 불가(佛家)에서는 이것을 청정자성(淸淨自性), 법성, 법계, 진리, 진여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부릅니다. 우리가 쓰는 여러 일상용어 중에서 가장 가까운 말이 있다면, '소박한 마음' 정도의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소(素)'라 하는 게 '흴 소'자요. 전혀 잡된 게 끼여들지 않은, 어떤 개념도, 어떤 이론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논리적인 근거,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근거가 끼여들지 않은 본래적인 것,· · · 소박하고 청정한 청정심(淸淨心)을 말합니다. 이때의 청정이란, 더러운 것을 배제하고 깨끗한 것을 취하는 게 아니고,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그런 개념이 일체 붙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박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가 '이것이 소박한 마음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소박한 마음 아닌 거를 알아내 봅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 가운데 소박한 마음이 아닌 거,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훌륭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사회적인 도덕성이라든가, 훌륭하다고 추구하고 있는 것, 어떤 이상을 만들어놓고 그 이상에 접근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것이 과연 이 소박한 마음에 해당하는가 안 하는가 지금 그걸 알아보는 거요.

 소박한 마음, 본래 마음, 청정한 마음은 추구할 수가 없어요. 새삼스레 추구할 그 어떤 대상이 아니고 우리 본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내 건데 뭘 추구하겠어요? 그래서 '부처가 또 부처를 찾는다'거나, '대장부가 머리를 두고 또 머리를 찾는다'는 말이 있는 거요.
 지금 우리는 참 추구하는 게 많죠? 진리니 이상이니 하는 게 전부 우리가 추구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는 둥, 그런 비슷한 소리를 많이들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대개 이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똑똑한 정신'은 소박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 소릴 들으면 이원적으로 길들여진 여러분은 금방 '그럼 멍청한 정신이면 되겠네' 하겠지요?· · · 똑똑해도 틀리는데 멍청한 걸 어디다 쓰겠어요?
 지식이 많거나 신념이 많은 정신은 소박한 정신이 아닙니다. 그 지식 가지고 한몫 보려는 사람, 그 지식 가지고 자기 현시, 자기 확인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 또 신념이 많아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아주 굳어져 버린 사람, 그렇게 지식이 많고 신념이 많은 마음은 소박한 마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에 유추해서, 우리가 좋다고 추구하는 모든 것은, '본래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뭔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안정되게 해주고 보다 훌륭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한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인가에 자꾸 의지해요. 종교에 의지하건 철학에 의지하건 사상에 의지하건, 또 뭐하면 어떤 정당에 몸을 담던가, 어떤 이념을 추구한다든가 그러는데, 그런 정신은 전부다 소박한 마음이 아니오.

 이 소박한 마음을 떠난 마음은 경박한 마음이라 할 수 있소. 여러분 누구한테 경박하다는 소리 들으면 속상하죠? 그런데 범부는 전부다 경박한 사람이오. 뭔가에 의지하는, 뭔가에 의지해서 보다 나은 새로운 자극을 늘 구하는 사람, 보다 나은 그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 사람에 의지하건 법에 의지하건 재물에 의지하건 명예에 의지하건 권세에 의지하건 뭔가에 의지해서 자기만족을 취하는 그런 정신 상태는 전부 경박한 거요. 그런데 우리 범부들은 지금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고 있죠? 우리 범부들은 지금 전부 경박하게 들떠 있다는 얘기요. 의타적이오. 뭔가 의지하고 뭔가 끊임없이 추구해요. 가장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인 체험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한다해도 모두 경박한 거요.
 그런데 이 경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특성은 뭔가? 이 경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도피를 해요. 뭔가 다른 것을 구해요. 자기를 회피한단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인 '나'하고 그냥 살지 못하고, 보다 나은 것을 자꾸 추구해요. 그게 자기 도피요. '도(道)'는 본래 행해지고 있는데, '도' 그 자체와 더불어 살지 않고, 머릿속으로 내가 그려낸 것을 지금 추구하는 것으로 삶의 지표나 목표로 삼았단 말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어떤 목표나 어떤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마음은 소박한 마음이 아니고 경박한 마음이라 소리예요.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해요. 이 경박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는가? 이 경박한 마음을 해소해야 '본래 마음'이 돌아올 것 아니겠어요?· · · 그러나 절대로 이 경박한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해선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 · 경박한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순간,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두 갈래가 나기 때문이오. 지금 '나'는 경박하죠? 그럼 경박함을 없애고 경박하지 않은 '나'가 되려고 애쓸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경박한 '나'가 경박하지 않은 '나'로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그 노력에다가 어떤 정당성이라든가 힘을 부여해요. 그리고는 정신 없이 내달아요. 지금 이 점이 중요합니다.· · · 우리가 어떤 의지적인 노력이나 뜻을 세워, '이건 아니다' 하고 판단하고 결론 내려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순간 '나'와 '나 아닌 것'의 이중적인 작용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용 속에 그 '나'가 지속되는 거요. 지금 현재의 '나'는 불만이기 때문에 이놈이 다른 것으로 돼야 하잖아요? 다른 보다 나은 그 어떤 것으로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게 계속 '나' 아닙니까?
 자기 자신이 경박한 마음밖에 굴리고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경박한 마음, 대단히 우둔하고 때묻은 혼란스러운 이 마음을 그와 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하는 한, 그 우둔함은 계속 되는 거예요. 혼란은 계속된단 말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봐라· · · ' 그것이 성인들이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몹시 우둔하고 마음이 좁아터지고 인색하고 탐욕스럽다는 사실을 그냥 바라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경박하지 않은 참다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그냥 보세요, 일체 토를 달지 말고, 이름 붙이지 말고. 경박함이 됐건 우둔함이 됐건 탐욕스러움이 됐건 그게 뭐 건간에 그냥 볼 수 있는 마음, 그게 '본래 마음'이오. 이렇게 또 설명하면 '본래 마음'에 흠집을 내는 거요. '본래 마음'은 차별이 없어요. 옳고 그른 것도 없고, 높고 낮은 것도 없어요. '본래 마음'은 허공 같아서 거기엔 아무런 중심이 없어요. 거기에는 고여 있는 것도 없고 축적된 것도 없어요. 때문에 이 '본래 마음'은 모든 것을 그냥 볼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그냥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본래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축적한 허망한 식심(識心)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뭔가를 계속 취사선택하고 뭔가를 취향하기 때문인 거요. 그게 전부다 '나'라는 중심 때문에 생겨난 거요. 이 '본래 마음'은 도대체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지금 걱정되는 게 뭐냐 하면, '본래 마음'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라는 그 얘기가 틀린 말은 아닌데, 여러분이 그 말을 들을 때에는, 있는 그대로 봄으로 해서 얻어지는 그 뭔가를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본래 마음'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멀어져요. 그러니 '본래 마음'이라 하는 이름에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진실에서 멀어져요. 노력을 왜 해요? 내가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잖아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여러분 자기 자신이 경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박하지 않은 나로 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더욱더 경박해집니다.

 본래 온전합니다. 본래 부처라는 얘기요. 이 '본래 마음'은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라 본래 갖고 있는 거요. 그런데 자꾸 노력해서 얻으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원인을 닦아서 결과를 추구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한 거요. 원인을 닦아서 결과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본래 마음'이 뭔지 모르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추구하지 않으리라' 하고 얘기하겠죠? 그러면 그 사람은 벌써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경지'를 추구하고 있어요. 벌써 때를 묻혔다고.· · · 그래서 '지혜 광명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 빛나게 하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겁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배우죠? 열심히 듣고 열심히 읽고, 그것도 부족해서 열심히 닦아요. 닦고 맑히고,· · · 그게 전부다 이 '나'를 훌륭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강화, 자기 확대의 노력이지 저 '본래 마음'하고는 상관없는 거요.
 내가 저 '본래 마음'이라고 했는데 저 '본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저 '본래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오. 저 '본래 마음'이라고 말하는 그 놈이 바로 그 놈이오.
 중요한 것은 참된 실체인 본래의 그 '여여한 마음', '소박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언어나 문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요. 이 이치를 잘 이해해서 그 언어나 문자를 사용하면서도 그 언어나 문자의 굴레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붙잡히지 않아야 된단 말입니다. '본래 마음'을 찾은 사람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마침내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