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은 '봄'이 아니다.
  2. 법문(法門) : '본래 마음'은 인식작용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3. 공안(公案) : 이 '몸'과 '마음'은 모두가 '참 마음' 위에 나타난 그림자이다.
  4. 게송(揭頌) : '심성'은 나지 않거늘 어찌 알거나 보려고 하는가.
 
     
   
     
   


 어느 날 부처님께 아난(阿難)이 묻기를,· · ·

 《'깨달음의 성품'(覺性)은 '천진'(天眞)이요 '자연'(自然)이거늘 어찌하여 '인연'을 빌려서 '글'과 '뜻'으로 열고 분석합니까? 본래 부스럼이 없으니 따지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 ·

 《이 '항상한 성품'은 <인연으로 생긴 바의 것>을 좇지 않나니, 만약 '밝음'이나 '어둠' 등 허깨비 같은 법으로써 자체(自體)를 삼는다면, 이들 인연이 흩어질 때에는 '성품'은 따라서 끊어져 없어져야 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정밀한 깨달음의 묘한 밝음'
(精覺妙明)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고 '자연 아님'도 아니니, 곧 '옳음'도 없고 '옳음 아님'도 없고, '그름'도 아니고 '그름 아님'도 아니어서, 온갖 형상을 여의고 온갖 법에 즉했거늘, 네가 어찌 그 가운데서 마음을 내어 세간의 쓸모 없는 의논과 명상(名相)으로써 분별하려 하느냐. 마치 손바닥으로 허공을 만지려는 것과도 같아서 자못 애만 쓸지언정 허공이 어찌하여 너에게 잡히겠느냐.》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묻기를,· · ·
 《세간 사람들이 "내가 본다"고 말하는데, 어떤 것을 "본다"고 하며, 어떤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가?》하니, 아난이 대답하기를,· · ·
 《세간 사람들이 해나 달이나 등불 등의 빛으로 인하여 갖가지 형상을 보는 것을 일러서 "본다"고 말하며, 이들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고 하나이다.》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

 《아난아! 만약 빛의 밝음이 없을 때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어둠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둠을 본다면 그것은 빛의 밝음이 없을 뿐이거늘 어찌 "봄이 없다"고 하겠느냐. 만약 어두울 때 밝음을 보지 못하는 것을 "못 본다"고 한다면, 밝을 때 어둠을 보지 못하는 것도 "못 본다"고 해야 하리니, 그렇다면 두 모양을 다 "못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니라.
 이는 두 모양
(밝음과 어둠)이 서로 빼앗아서 없앰일지언정, <너의 '보는 성품'은 그 가운데서 잠깐도 없는 것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이 둘을 다 "본다"고 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못 본다"고 하겠느냐.
 따라서 '밝음'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밝음'이 아니고, '어둠'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어둠'이 아니며, '공
(空)'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공'이 아니고,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막힘'이 아니니라.
 이 네 가지 이치가 성립되었으니, 다시 분명히 알아야 하리라.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은 '봄'이 아니니라>. '보는 성품'은 '봄'을 여의어서 '봄'으로는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 다시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의 모양'이니 하고 말하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인연'이나 '자연' 등은 모두 세간의 말에 속한 것이며, '있음과 없음' '진리와 세속' 등이 다 분별하는 식심
(識心)이니라. 그러므로 '보는 성품'에 당했을 적에야 어찌 '보고 들음'(見聞)에 있겠으며, 바야흐로 '발명'(發明)이 있을 즈음에야 어찌 '말'이나 '생각'에 떨어지겠는가.
 만약 '지혜'의 바깥에 '진여'가 있다면
(眞如는)'소증'(所證)이 될 것이고, '진여'의 밖에 '지혜'가 있다면 (智慧는)'능증'(能證)이 되겠지만, 그러나 '지혜' 밖에 '진여'가 없고, '진여' 밖에 '지혜'가 없거늘 다시 어떤 법으로써 '화합'이나 '화합 아님'을 삼으려 하는가.
 아난아, 네가 비록 '본각의 묘명한 성품'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줄은 깨달았으나, 오히려 '본각의 근원'이 '화합'으로 난 것도 아니고, '화합이 아닌 것'으로 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셨다.


 그래서 경(經)에 이르기를,· · ·

 《만약 '보리심'이 생겨났다면 '생멸심'은 없어졌을 것이므로, 이 역시 다만 '생멸'일 뿐이니라. 또한 '생성과 소멸'이 모두 다해서 '공용(功用)의 도리'가 없고 다만 '자연'으로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자연심'이 생기고 '생멸심'이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 역시 '생멸'일 뿐이니라.
 또한 생성도 소멸도 없는 것을 '자연'이라 한다면, 이는 마치 세간에서 모든 것이 섞여서 한 덩이
(一體)가 된 것을 '화합'이라 하고, '화합'이 아닌 것을 '본연(本然)의 성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본연'과 '본연 아님', '화합'과 '화합 아님' 등을 모두 여의고, '여의고 여의지 않고'까지 다 아니어야 비로소 '희론
(戱論)이 아닌 법'이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보리'와 '열반'은 아직 요원하니라.
 본래의 '참 성품'을 깨달아서 '하나의 신령한 성품'은 움직임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니며, 얻음도 아니고 잃음도 아니며, 남
(生)도 아니고 사라짐도 아니며, 합함도 아니고 여읨도 아님을 밝히고 보면, 끝없는 때로부터 삼계(三界)로 방랑하고, 육취(六趣)로 미쳐서 달아났던 이것이 '미혹'이요, 이것이 '뒤바뀜'이요, 이것이 '망령됨'이요, 이것이 '헛됨'이어서, 이 모두가 다만 '정상'(情想)으로 맺어 이루어지고, '식심(識心)'의 울림임을 알 것이다.
 만약 '본각의 참 성품'을 깨달으면 이것은 인
(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고 '자연 아님'도 아니며, '어울림'도 아니고 '어울림 아님'도 아니며, '화합'도 아니고 '화합 아님'도 아니어서, 이 모두가 쓸모 없는 의논을 이루고, 모두가 삿(邪)된 생각에 떨어진다.
 끝내는 '참 마음'에도 머무름이 없거늘, 어찌 명상
(名相)과 처소(處所)가 존재하겠는가. 따라서 만약 식심으로 헤아리고, 글귀의 뜻으로 헤아리면서 '진실'을 구하려고 한다면, 이는 마치 바람을 붙잡아 매고, 그림자를 붙잡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