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연이 모이면 있는 듯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는 듯하다.
  2. 법문(法門) : 모든 작용은 그 주체가 없다.
  3. 공안(公案) : 모든 법이 본래부터 항상 적멸(寂滅)한 모습이다.
  4. 게송(揭頌) : '미혹'이 원인 없음을 알면 '허망'이 남이 없거늘· · · · · ·
 
     
   
     
   

 불법(佛法)에 관해 워낙 말과 글들이 많다 보니, 웬만큼 심지가 굳은 사람이 아니면 그런 말과 글의 홍수 속에 휩쓸려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든 경우가 많소. 그럴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언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연기설(緣起說)이오. 이 말을 듣고 '내가 초심자도 아닌데 무슨 연기설 정도를 지금· · · · · · '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그 연기설의 뜻을 깊이 참구하여 참으로 그 뜻을 체달한 사람은 만나기 어렵소.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경전을 뒤지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공부의 진척이 없는 것은, 늘 보다 새롭고, 보다 희한한, 남들이 모르는 묘한 말씀이 있지 않을까 하는 데에만, 다시 말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견을 늘리는 데에만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오. 법문을 강의나 강연 듣듯이 말로 알아들으면 그렇게 지견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소.


 말이란 뜻을 전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쓰는 거요. 그런데 그 방편인 말에 매달리고 말만을 쫓아다니지, 그 말에 담긴 뜻은 그냥 간과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소리요. 그렇게 계속 말과 글 속에서 뭔가를 뚜지고 천착(穿鑿)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그러한 생각이 연기설을 깊이 살핌으로써 비로소 쉬어질 수가 있소.




 연기설에 대해선 이미 차서 넘칠 만큼 숱한 예를 들어가며 충분히 드러내 보였소.(e보설 2장 참고) 연기설은 그동안 인간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기존의 모든 자연관, 물질관의 근간을 뒤흔드는 소리요.· · · · · ·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란 말이 있소. 확실히 그것은 인류문명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이었음이 틀림없소. 하늘이 움직이고 땅은 말 그대로 요지부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그게 정반대였던 거요. 하늘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땅이 움직인다는 사실. 그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오관(五官)이 미치는 범위 안의 것이 다인 줄 알았던 세계관이 오관의 영역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는 거요.


 깊은 통찰을 통해,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그 오관의 작용이란 것이 대단히 어중간하다는 것, 애매모호 하다는 것,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두꺼운 껍질을 벗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만나는 거요.




 인간이 늘 휘둘려 사는 마음, 혹은 그 마음에서 파생되는 말과 글들의 뿌리가 과연 무엇인가?· · · · · · 그토록 완강하고 강력한 어떤 결정적인 뜻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줄 알았던 그 모든 논리적인 근거가 연기설을 통해 몽땅 헛것이란 사실이 이미 드러났소. 말하자면 출발점부터 전부 비었다 소리요.


 우리가 살고있는 이 3차원 세계를 설명하는 시작이 바로 유클리드의 공리(公理)요.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는 있다. 그것을 점이라 한다.'· · · · · · 이것이 3차원 세계를 살고있는 우리 사고(思考)의 출발점이오.· · · · · ·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은 소리임을 알 수 있소. 쉬운 말로 얘기해서, '없는데 있는 거로 치고 출발해보자' 하는 말과 같은 거요.


 우리가 소위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 이것이 그렇게 대단히 취약한 기반 위에서 출발하여 그 위에 엄청난 구조물이 쌓아올려진 형국이오. 흔히 사상누각이란 말을 하지만, 사상누각도 모래라는 구체적인 사물 위에 세워진 것 아니오? 그러나 연기설을 통해 본,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신봉하고 떠받들고 있는 그 모든 이치나 도리의 근거는 뭐요?· · · · · · · · · · · · 전혀 없소. 허공에다 말뚝박은 것과 전혀 다르지 않소.· · · · · · 나중에는 '허공'이란 소리를 해도 방망이를 면치 못하오. 도대체 뭐가 허공이요?· · · · · · 그것도 마음이 지어낸 것 아니오? 허공도 여러분에게는 이미 어떤 존재란 말이오.· · · · · · 존재라는 것은 없소. 철저히 없는 거요.




 "모든 존재가 존재가 아니니라."· · · · · · 연기설이 바로 그 말이에요. 모든 존재가 무유자성(無有自性)이라, 그 어떤 것도 그 자체의 성품이 없는 거요. 자체의 성품이 없다 소리는 다시 말해, 그러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생각만으로 있다는 소리인 거요. 우리가 어떤 것을 지칭해서 '이것'이라고 할 때, 그 '이것'이라는 것은 그 어떤 존재의 성품을 종합해서 우리 머리 속에 이미 각인된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거요.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자체의 성품이 없다면 그게 무슨 뜻이겠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 · · · · 막걸리집 벽에도 써붙여져 있을 정도로 흔한 말이지만, 그 뜻을 참으로 깊이 사무쳐서 체달한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소.· · · · · · 우리 말로 쉽게 하면, '모든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그대로 존재다' 라는 소리요. 모든 존재가 원자폭탄을 터트려 날려버리고 난 다음, 허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그대로 존재라 소리요.


 참으로 진지한 사람은, '모든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라면 그게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먹고 마시고 숨 쉬고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 · · · · '하늘땅 삼라만상 몽땅 이게 무엇인가?' 하는 깊은 의증을 내야하오. 그저 건성으로 '그저 그렇고 그런 뜻이지, 뭐.' 하는 사람은 천만년이 가도 깨달을 분수는 없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라면 그와 같은 소식을 어떻게 알 수 있겠소?· · · · · ·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아는 자'가 있어서 그 무엇을 아는 구조요. 그런데 '아는 자'가 됐건, '아는 바'가 됐건 몽땅 허공이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안다'란 무엇이오?· · · · · · 설법을 들을 때, 대단히 진지하고 경건하고 성숙된 자세로 접근해야 하오. 그저 기왕에 알고 있던 지식이나 상식을 가지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설명하고, 그런 식으로 공부하면 천년 만년이 가도 눈먼 당나귀 소리를 면할 수가 없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기존의 상식과 지식, 일체의 논리체계와 가치체계들이 그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다음 넘어야 할 준령(峻嶺)이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인연 따라 나는 모든 것은 자체로는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체의 성품이 없다.'· · · · · · 이것이라 할 수도 없고 이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이 세상 일체만유가 그 이름도 모양도 뜻도 전부 다 빈 것이라면, 연기설, 즉 무언가 인연이 합해서 이루어졌다는 그 말도, 그 말 자체가 의지할 근거를 스스로 박탈하는 거요.


 그래서 철저히 남(生)이 없는 거요. 무생(無生)이오.· · · · · · 인연 따라 난 것은 나긴 났는데, 겉모양만 무언가 난 것처럼 느껴질 뿐, 실제로는 난 게 없다 소리요.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체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성품이 있다면 인연을 기다릴 게 뭐 있겠소? 인연에 의지할 것 없이 스스로 존재할 테니 말이오.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다면, 그 그림자는 전적으로 나무에 의지해 있는 것이니, 그림자 자체로는 성품이 없다 소리요. 모든 게 다 그렇소. 나무 역시, 흙이나 수분, 영양분, 공기, 햇빛· · · · · · 이런 모든 인연이 합하지 않으면 무엇이 나무요? 나무라 할 것이 없지 않겠소?




 모든 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이오. 만법이 모두 그 무엇인가에 의지해서만 존재하는 것인데, 우리들의 인식작용이 지극히 국소적(局所的)이라 어느 특정대상만, 즉 나무 하면 나무만 보고 그 이외의 것은 전부 배제하고 보는 거요. 이것이 소위 관견(管見)이니, 그렇게 붓대롱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면, 계속 그 조그만 구멍 속에 뭔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거요.


 넓은 모래벌 위에 온갖 형상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지만, 모래벌 전체로 보면 아무것도 생긴 것도 사라진 것도 없고, 늘고 줄고 하는 일도 없다는 얘기요. 실제로는 전혀 생긴 게 없는데, 전부 겉모양만 보고 무언가 생겼다고 하고 사라졌다고 하는 거요.· · · · · · 무생이오. 철저히 무생이오.


 이처럼 연기설을 조금만 깊이 참구해 보면 일체가 무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인간의 상식으로 전혀 검토함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기존의 모든 것들, 모든 존재의 근거가 전혀 가상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일체가 무생이라 도무지 새로 나는 것이란 없으니, 작용이 있을 수 없소.(無作)· · · · · · 인간의 의식은 모든 것을 철저히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도록 틀 지워져 있기 때문에 무언가 작용이 일어났다 하면 반드시 그 작용의 주체가 있기 마련이오. 그래서 그것을 서술하기 위한 기본구조는 항상 <주어+술어>의 형식을 빌려야 하오. 주어가 뭐요? 작용의 주체를 말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연기설을 통해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도무지 그 작용의 주체가 없다는 사실이오. 어디를 찾아봐도 작용을 일으키는 주체가 없는 거요.


 연기설이 제자리를 얻게 되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모든 서술은 무의미해지는 거요. 서술할 것이 없는 거요. 모든 것이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작용을 일으키는 주체가 있는 게 아니니,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그 상황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든가, 피해를 입는다든가 하는 그런 일은 없다 소리요.


 여러분이 끝까지 지키고 싶어하는 '나'는 누구요?· · · · · · 마찬가지요. 어디를 찾아봐도 '나'라고 할 만한 '나'는 없소. 이 '나'는 철저히 우리의 생각으로만 엮어진 거요. 실체가 없소. 전부 인연생기요. 밥과 반찬, 물과 공기를 몽땅 빼앗아도 '나'를 주장할 수 있겠소?· · · · · · 전부 이러저러한 인연들이 모인 것뿐이오. 딱히 요게 요거라고 구분을 지을 한계가 없다 소리요. 그러니 온통 어디에도 '나' 아님이 없는 거요. 상하, 전후, 좌우 몽땅 다 '나' 아님이 없는 거요.


 작용의 주체, 수용의 주체가 본래 없소. 그러니 이해득실, 길흉화복이 붙을 주체가 없는 거요. 잘나고 못나고, 귀하고 천하고 하는 모든 이름이 붙을 대상이 없다는 얘기요. 전부 하나의 부처일 뿐이오.· · · · · · 그러니 하나의 바다 위에 다만 바람 따라 온갖 모습의 파도가 출렁거리는 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소위 현세(現世)라는 것이오.


 연기즉무기(緣起卽無起)라,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게 아니니, 이 사실을 투철하게 깨달으면 이른바 말 길이 끊어져서 더 이상 설명할 게 없고, 드러낼 게 없고, 알 게 없고, 짐작할 게 없고, 그냥 저절로 없어지는 거요.· · · · · · 이 말을 듣고 이젠 말도 안 하고 아무 것도 할 필요 없다고 알면, 그렇게 알아들은 바가 있으면, 여전히 미혹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대는 거요. 일어나는 게 일어나는 그 채로 일어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하오.· · · · · · 지금도 여전히 바람이 불면 인경은 울릴 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