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있는 그대로 이면 빠르지만 조작하면 더딜 뿐이다.
  2. 법문(法門) : 심성(心性)이 본래 천진(天眞)이라,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다.
  3. 공안(公案) : 보려면 당장 봐야 할 것이요, 헤아리고 더듬으면 어긋나느니라.
  4. 게송(揭頌) : 천진(天眞)이라, 원래 구족하거늘 닦고 증득하고 하면 더욱 어긋난다.
 
     
   
     
   

 생각이 있으면 범부요, 생각이 없으면 부처요. 참된 불자(佛子)라면 무엇보다 먼저 이 무념(無念)의 도리를 알아야 하오.· · · · · · 이 생각이라는 것이 본래 생각인 채로 생각이 아닌 것이니, 생각이 났을 때에도 난 생각이 없는 거요. 그것이 옳은 생각이건 그른 생각이건, 깨달은 생각이건 미혹한 생각이건, 그 모든 생각이 본래 없는 거라 소리요.· · · · · · 이렇게 생각 있음인 채로 생각 없음인 줄을 깊이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생각 없음(無念)' 이오.


 여러분은 어떻소?· · · · · ·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생각을 몽땅 쓸어 없애고 난 연후에, '생각 없음'이 나타나는 줄 알고 있진 않소?· · · · · · 일체 만법이 생(生)하고 멸(滅)하고, 가고 오고 하는 이대로 여여(如如)한 거요. 한 법도 새로 생겨나거나 옮기거나 사라지는 법이 없이 본래 적멸(寂滅)하다 소리요.


 본래 한 법도 없이 적멸한 가운데, 중생이 다만,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제 마음의 업(業) 때문에 나타나는 그림자인 줄 모르고 뭔가 실제로 나타났다고, 뭔가 실제로 보인다고, 들린다고 소란을 피우는 거요.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게 전부 허망한 그림자놀음이오. 일체 만법이 다만 생각으로 지은 것일 뿐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일체의 모습이 몽땅 허망한 것임을 투철히 깨닫기 전에는 도무지 벗어날 도리가 없는 거요.


 예부터 수많은 선지식들이 진실이 이러함을 숱하게 드러내 보였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여전히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가 아닌, 보다 나은 보다 훌륭한 그 무엇이 되기 위해 늘 헐떡대고 있소. 그러니 이런 선불장(選佛場)에 와서도 묻는 것이 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겁니까, 저겁니까?" 따위의 방편을 묻고 있는 거요.
 
 
 방편을 묻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뭔가 옳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이 있음을 상정해놓고 ―주로 해탈, 열반, 성불 따위― 그에 도달하기 위해 두 법 중에 한 법은 취하고 한 법은 버리겠다는 뜻이니, 모든 것이 한 마음으로 원융되지 못하고 그렇게 계속 문밖에서 이쪽저쪽 먼지만 피운다면 도무지 깨달을 분수는 없는 거요.




 진지한 수행자라면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한테 '그게 왜 문제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봐야 하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해놓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응당 밖에서 찾으려고 하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한 게 '나'라면, '내가 왜 그것을 문제삼았는가?' 하는 것을 먼저 물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미혹한 중생에겐 문제가 늘 바깥에 있소. 내가 보는 그 무엇, 내가 들은 그 무엇, 나한테 부딪쳐 오는 그 어떤 상황이 늘 나한테 문제요. 그러면서 그것을 문제라고 짓고 있는 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 거요. 자기가 한 생각 일으킴으로 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모르고있다 소리요. 설사 그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질 않소. 그러니 미혹했다고 그러는 거요.· · · · · ·


 심생종종법생(心生種種法生)이라, 한 생각이 나면 온갖 문제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심멸(心滅)이면 종종법(種種法)이 멸(滅)하니, 한 생각도 없으면 전혀 아무 일 없는 거요.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음으로써 그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너무 당연한 듯한 그 생각이 그릇된 거요. 일체 만법은 오직 마음이 지은 바요. 인간이 말과 글로 담아내는 언어화되고 개념화된 모든 것, 즉 이 세상 만법이 몽땅, 그 '한 마음'에 의지하여 세워지는 것이니, 그 근원을 걷어잡는다면 애당초 문제는 없었던 거라 소리요.


 흔히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소. 한 마디로 심성(心性)을 밝히는 게 공부요.· · · · · · 그러나 심성은 길러질 수도 없고, 교정될 수도 없고, 단련될 수도 없소. 어떤 영향을 가해서 통제하고 조작한다면 그것은 심성을 밝히려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면 보다 안정되고 보다 이롭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처세의 방법을 배우려는 데에 관심이 있는 거요.· · · · · ·


 심성, 다시 말해 진리는 인간의 관찰의 대상도 아니요, 인식의 대상도 아니오. 그러니 진리는 배울 수도 없고, 갈고 닦을 수도 없는 거요. 그러한 진리를 밝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라 할 수 있으니, 흔히 세속에서 말하는 배우고 익히는 공부쯤으로 알고 이 길에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당나귀 해가 되어도 심성을 밝히긴 글른 거요.




 지금 이 자리에도, 속으로 '현재 나는 진리를 탐구하고 있고, 앞으로 끝내 진리를 탐구해 마치리라.' 하는 작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요. 그러나 진리 탐구가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주어질 궁극적인 어떤 성과인 줄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영 진리를 밝힐 수 없소. 성품을 밝힐 수 없다 소리요.· · · · · · 진리는 지금도 항상 행해지고 있소. 그러나 그가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오.


 식(識)을 여의고 성품을 밝히는 일 이외에 깨달음의 길은 없소. 그러니 그 내용이 뭐였건 간에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안 되고 하는 따위의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한, 성품을 밝힐 수 있는 가망은 없소.· · · · · · 심성을 밝히는 데는 절대로 어떤 방편에도 의지하지 마시오. 아무리 좋은 것,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예외 없소. 황금가루도 눈(目)에 들어가면 눈병만 날 뿐이오. 심성은 있는 그대로 붓다도 태어나기 이전부터 영겁토록 늘 그대로 본래 온전했소.


 심성에 의해 지어진 바가 온갖 법(法)이오. 그 심성이 한 번 구르면 온갖 옳고 그름, 되고 안 되고의 차별법이 생기는 거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길을 잃소. 한번 길을 잃으면, 스스로는 절대로 출구를 찾을 수 없소. 왜 그렇겠소?· · · · · · 출구를 찾으려는 그 의도자체가 출구를 점점 막막하게 막아버리기 때문이오. 마음의 구조가 본래 그렇소.


 미혹한 범부에게는, 출구가 안 보일 때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보이겠지만, 사실은 노력하면 할수록 출구는 막히는 거요.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금세'그럼 노력 안 하면 되겠네?' 하는 생각을 할 거요. 노력해도 틀리는데, 노력 안 하면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소?· · · · · · 지금 이 어간에서 활로(活路)를 찾아야 하는 거요.




 일체 만유가 몽땅 비어서, 그 무엇 하나 이거랗거니 저거랗거니 하며 지칭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투철히 사무치면 그걸 일러 보리(菩提)라 하는 거요. 마음에 드네, 안 드네, 이러쿵저러쿵 이름을 짓고 뜻을 짓기 이전의 그 본래마음이 그대로 보리요. 그러니 그 본래마음이 비추어내는 물물건건(物物件件)이 어느 것 하나 보리 아님이 있을 수 있겠소?· · · · · ·


 그저 저절로 환히 밝은 그 비춤의 성품으로 하여금, 보고 듣는 데에 맡겨서 그냥 자재하게 쓰면 되는 거요. 이름을 짓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좋다 싫다, 취하고 버리고 하지 않고 그냥 비출 수 있다면, 그게 전부 그대로 보리요.


 그러니 여기서 "본래 청정하고 스스로 환히 밝은 그 마음 그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지만, 그대가 심행을 일으킨다면 곧 더디리라" 하는 말의 뜻을 깊이 사무쳐야 하오. 뭔가 지어서 이루고자 하고, 깨닫고자 하고, 알고자 한다면 더디다 소리요. 왜 그렇겠소?· · · · · · 이미 그 어느 것 하나 보리 아님이 없으니 새삼 다시 이룰 것도, 얻을 것도 없지 않겠소?




― 이 세상에 보리지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 보리지혜를 얻을 사람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보리지혜를 얻습니까?
― 만약 그가, 이름도 없고 성(姓)도 없고 몸도 없고 마음도 없으면, 그 사람이 곧 보리지혜를 얻습니다.




 이름도 성(姓)도 없고 몸도 마음도 없는 그 사람은, 보리지혜를 생각하지도 않고, 보리좌(菩提座)에 나아가서 금강정(金剛定)에 들기를 바라지도 않소. 이 세상 모든 고뇌와 번뇌에 허덕이는, 구제해야 할 중생이 있다고도 보지 않고, 이미 많은 여러 대덕 스님들과 많은 부처님들이 만 중생을 제도했다는 것도 보지 않소. 부처의 거룩한 지혜, 부처의 전지전능한 모든 힘, 법력, 그 어떤 공덕도 보는 일이 없소. 일체 만법이 털끝 만한 한 법도 얻을 만한 법도 없고 버릴 만한 법도 없고, 한 법도 이루어질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고, 일체 만유가 본래 있는 그대로인 채로 적멸(寂滅)이오.




― 당신은 보리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 아닙니다. 나는 보리지혜를 구하지도 않고 보리지혜를 얻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나 자신이니, 어찌 보리가 보리를 또한 구합니까?




 지금까지, '이것'이라고 혹은 '저것'이라고, 좋다고 싫다고, 훌륭하다고 범속하다고 지었던 모든 것들이, 단 한 순간 전부다 모습도 비었고 이름도 의미도 다 비어서 몽땅 꿈같고 잠꼬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투철히 사무치면 그게 바로 실상의 보리요. 그러니 거기엔 더 이상 이름 지을 일도 없고, 좋다고 싫다고 분별 지을 일도 없고, 그러니 취하고 버릴 일도 없이, 그냥 다만 봄(觀)이 있을 뿐이오. 시간도 노력도 들임이 없이, 손끝 하나 달싹 안 하고, 지금 이대로인 채로 부처 자리인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