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과(因果)가 동시(同時)라 결코 앞뒤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2. 법문(法門) : 불은 스스로 뜨겁다고 하지 않는다.
  3. 공안(公案) : 의식이 형상을 따라 움직이면 번뇌요, 의식이라 할 뿐, 마음은 아니니라.
  4. 게송(揭頌) : 참됨을 구하려 하지말고 오직 소견을 쉬어라.
 
     
   
     
   

 여러분은 지금 최상승(最上乘) 법문인 일승법(一乘法)이 설해지는 자리에 동참하고 있소. 이 말은 여러 법회 중에서 이 법회가 최고라는 그런 세속적인 비교의 의미가 아니오.· · · · · · '허물이 있는가 없는가? 허물이 있다면 왜 있는가? 그 원인을 알아서 허물을 제거한다' 등등, 그러한 초인대과(招因帶果)하는 생멸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소리요.
 
 일승법이라 하는 말은 '허물 있음'이나 '허물 없음'이나, '나 있음'이나 '나 없음'이나 오직 '한 마음'에 나타난 그림자일 뿐, 그 본래 마음은 일찍이 문턱을 넘은 일이 없다는 것을 이르는 거요.

 본래 마음은 '한 마음'인데 '한 마음'이 뭔가를 인정하는 순간, 한 찰나에 둘이 돼버리는 거요.· · · · · · 왜 그렇겠소?· · · · · · 뭔가를 인정하기 위해선 '인정하는 자(能)'가 있고, '인정하는 바(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보는 자'와 '보는 바'가 있고, '경험하는 자'와 '경험되어진 바'가 있으면, 한 찰나에 '한 마음'이 둘로 쪼개지는 거요. 둘로 쪼개지면 곧 셋이 되고 넷이 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 버려요. 그게 한 찰나요.

 또 거기에 의미가 부여되고, 그와 연관돼서 제 3의 것이 생겨나고, 그런 식으로 수 천, 수 만 갈래로 나뉘어진 것이 바로 이 천태만상이오. 그리고 그런 수많은 갈래의 관계를 얼기설기 엮어놓은 것이 인간이 그토록 떠받드는 지식이요, 더 나아가 그것의 집합체가 소위 말하는 문명이라는 거요. 

 그러나 제 아무리 수도 없이 가르고 나누고 해도 그 본래 마음은 일찍이 미동조차 한 적이 없소. 늘 그대로요.




 마음과 대상은 서로 교섭할 수 없소. 교섭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이 가능하겠소?· · · · · · 지금 우리의 경험은, 여기 있는 이 마음이 저기 저만큼 떨어져 있는 어떤 대상을 알아본다는, 그러한 잘못된 생각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거요.

 마음 바깥에 있는 대상을 대상 바깥에 있는 마음이 알아볼 수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허무맹랑한 가정에서 깨어나야 하오. 다만 중생이 미혹해서 마음에 나타나는 이 그림자와 저 그림자를 별개의 실체라고 인정하면서부터 두 법이 되어버린 거요.· · · · · · 마음은 항상 '한 마음'뿐이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물으셨소.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가?"
 "여래께서 마음이 뭐냐고 물으셔서, 제가 마음이 뭘까 하고 더듬고 헤아리고 궁리해서 이렇다고 알고 저렇다고 아는, 이것이 마음입니다."하니,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그것은 너의 마음이 아니니라." 그러자 아난이 놀라서 여쭸소.
 "그게 마음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마음입니까? 제가 많은 경전을 읽고, 많은 부처님을 모시고, 법문을 듣고, 공양해 모시는 그 모든 것을 다 마음으로 하는데, 그게 마음이 아니라면, 도대체 저는 무엇을 가지고 이 불법을 닦고 배워야 됩니까?" 하니, 간곡하게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어서 이게 이거라고 알고, 저게 저거라고 아는 그것은 마음이 아니니라. 만약 산을 보는 게 그대의 마음이라면, 산을 안 볼 때에 그대 마음은 산과 더불어 사라졌으리라. 소리를 들었을 때 들리는 소리가 그대 마음이라면, 소리가 사라질 때 그대 마음은 더불어 사라지리라. 그대가 즐거울 때 즐거운 게 그대 마음이라면,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그대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괴로울 때 괴로운 게 그대 마음이라면, 괴로움이 사라졌을 때 그대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왜 이치를 알지 못하는가?"· · · · · ·




 항상(恒常)해서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인연 따라 모든 것을 다함 없이 지어내는, 일찍이 끊어지는 일이 없고, 봤다 안 봤다, 했다 안 했다,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법이 없는, 늘 신령스럽게 환히 비추는 그 참마음을 잃어버리고, 거기에 비추어진 그림자만을 허망하게 자기 마음인 줄 알고 좇아 다니기 때문에 그대의 심신이 그렇게 고단한 거라고 말씀하신 거요.

 소리가 나면 듣고, 소리가 안 나면 못 듣는 게 당연한 거라고 다들 알지요? 부처님 말씀은 간단한 거요.

 "소리가 날 땐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소리가 안 날 때는, 소리가 안 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가? 소리가 난다고 듣고, 소리가 안 난다고 듣고, 들었기 때문에 소리가 안 난다는 걸 알지 않는가?

 조명이 있을 때는 본다 하고, 조명이 없을 때는 못 본다 한다면, 조명이 없을 때 못 본다는 그 어둠은 뭘 가지고 봤는가? 어두워서 빛이 없는 것을 못 본다고 한다면, 밝을 때 어두움이 없는 것도, (어둠을)못 본다고 해야 되리라.

 그러니 그대들이 항상 신령스럽게 스스로 빛나고 있는 그 참마음을 잃어버리고, 그 마음에 나타나는 그림자만을 가지고, 있다 커니, 없다 커니, 보인다 커니, 안 보인다 커니 하는 건 참으로 망령되니라." 하신 거요. 그림자를 가지고 실체화해서 이러쿵저러쿵 정신이 팔려있으니 망령된 게 당연하지 않소?




 그 참마음(眞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단 한순간의 짬도 없이 계속 작용하고 있소. 그 참마음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모든 현상이 일어나지만, 참마음을 가지고는 참마음 자체를 알아보는 방법이 없으니, 그건 눈으로 모든 걸 다 봐도 제 눈은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요.

 그 참마음이 모든 작용을 일으키되, 하나도 냄이 없이 내는 것이니, 그걸 일러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는 거요. 참마음의 그 '신령스러운 앎의 성품(靈覺性)'은 스스로는 앎도 없고 함도 없이 그렇게 그냥 모든 걸 다 응해 줄뿐이오.

 지금 우리가 저 바깥에 실체라고 여기고 있는 대상은 사실은 형상이 없는 허공 꽃 같은 거요. 슬프니 기쁘니 하는, 흔히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 경계를 실체로 봄으로써 생겨나는 환상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그 경계는 전적으로 마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마음도 경계도 서로에 의지해 있을 뿐, 전혀 실체가 없는 거요. 지금까지 그게 '내' 마음인 줄 알고 휘두르며 속상해 하고 우쭐해 하고 울고불고 했는데 그게 '내' 참마음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여러분은 도대체 뭘 한 거요?

 꿈속에서는 '나'도, '나'에 의해서 인식되어진 대상도 실체가 없는 거지 않소? 실체가 없는데도 보는 일이 이루어지잖아요? 그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거요.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현실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일이나 그 구조가 똑같은 거요.

 마음은 스스로 앎이 없소. 경계 또한 스스로 모습이 없소. 이 허망한 것과 허망한 것이 어울려 허망한 것을 낳는 거요. 허망과 허망이 어우러서 허망을 낳았으니, 그것은 그저 한바탕 지난 밤 꿈과 전혀 다르지가 않은 거요. 꿈을 꾸기는 꿨는데 아무 일도 본래 없다는 소리요.




 이 말을 듣고, 대경(對境)이 본래 전부 모습이 없는 것이니, 하나도 안 보고 안 듣고 했다 칩시다. 그래서 그 어간에서 아주 유연하고 한가롭고 적멸한 경지를 체험했다 칩시다.· · · · · · 그러나 그것조차도 한낱 뜻으로 헤아린 것에 불과한 거요. 그렇게 고요하고 적멸하고 평안한 경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누가 안단 말이오? 여전히 뜻으로 헤아리는 법 티끌(法塵)일 뿐이오.

 모든 것을 다 쉬고 놓고 지우고 해서 적멸하고 고요한 자리를 체달했다고 해도, 내 마음이 고요함을 보고 있는 한, 그것은 여전히 내 마음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오.· · · · · · 의식의 영역 바깥의 것을 계속 의식으로 더듬으려 한다면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거요.




 마음뿐이라면, 작용자(作用者)도 마음이고 작용도 마음이라 소리요. 작용자와 작용이 둘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 · · · · 춥기는 추운데 '추운 자'가 없다 소리요. 여러분은 어떻소? '추운 자'가 춥지요? '추운 자'가 추우니까 추움을 모면하려고 하지 않소? 그렇게 '추운 자'와 추움이 따로 있다면, 이 '추운 자'는 끝없이 자신의 편이함을 위해 추움을 따뜻함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돼 있소.

 만약 '추운 자'하고 추움이 둘이 아니라면, 추움 때문에 추워죽겠다고, 그래서 추움을 피해야겠다고 할 자가 누구요?· · · · · · 불은 스스로 뜨겁다고 하지 않소. 얼음도 스스로 차갑다고 하지 않고.· · · · · · 능·소(能所)가 둘로 갈라짐으로써 중생이 지금 우주의 미아가 돼버린 거요. 그래서 '마음에 능·소가 없으면 곧 정각(正覺)을 이룬다' 한 거요.

 법문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요. '듣는 자'도 '들은 바'도 없이 그저 '들음'이 있을 뿐이라면, 그 '들음'을 누가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면서 분별적으로 취사선택하겠소? 설사 분별한들, 분별하면 틀리고 분별 안 하면 맞다고 누가 주문을 하겠냔 말이오.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할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거기에는 '보는 자'가 없소.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관점에서, 관찰자인 '내'가 어떤 관찰 방법을 익혀야지 평온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속셈을 깔고 보고 있소. 관찰자가 없이 그 모든 것을 그냥 비출 뿐이라면, 그 자체로서 이미 평온은 깃들어 있는 거요.

 이 말은 듣도 보도 못하는 바보처럼 목석(木石)처럼 돼라 소리가 아니오. 항상 모든 감관에 응해서 작용하지만, 작용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온갖 법을 분별해서 따지지만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리요.

 분별하기는 분별하는데, '분별하는 자'가 분별을 일으키는 그런 구조가 아니고, 거기 그냥 분별이 있을 뿐이오. 경우에 따라서 분별도 하고 그냥 비추기도 하며 별 거 다하지만, 마음뿐인 것 같으면 그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할 놈은 없는 거요.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고요하기도 하고 산란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기에는 '고요한 놈'도 '산란한 놈'도 없는 것이 진실이오. '그러는 놈'이 없는데 어떻게 '그러는 바'가 저 혼자 있을 수 있겠소?· · · · · · 항상 그렇게 알고 가면 그게 잘 따라 가는 거요. 그것이 점점 깊어져서 보건 듣건 스스로 생각이 없어지면, 거기엔 '보는 자'도 '듣는 자'도 없는 거요.




 참마음은 자유롭지도 않고 자유롭지 않지도 않소. 거기에는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소. 밝음도 없고 어두움도 없고, 혼란도 없고 고요함도 없소. 그놈이 한번 굴러서 나투면 자유롭니 부자유스럽니 이러니저러니 하는 온갖 시비가 나타나는 거요. 하지만 그러한 시비조차도 참마음의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이라면, 그건 애써 떨쳐버릴 것도 아니요, 집착할 만한 것도 아닌 거요. 혼란스럽건 고요하건 그건 그저 빈 말일 뿐이고 빈 그림자일 뿐인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