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과(因果)가 동시(同時)라 결코 앞뒤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2. 법문(法門) : 불은 스스로 뜨겁다고 하지 않는다.
  3. 공안(公案) : 의식이 형상을 따라 움직이면 번뇌요, 의식이라 할 뿐, 마음은 아니니라.
  4. 게송(揭頌) : 참됨을 구하려 하지말고 오직 소견을 쉬어라.
 
     
   
     
   

 불가(佛家)에 입문하여 적지 않은 기간동안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도 대개 일승법(一乘法)이라 하면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가의 여러 가르침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결론부터 얘기해서, 불법(佛法)은 본래가 일승법이니 그 이외에 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협량(狹量)한 범부가 한 마디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범부의 근기에 따라 갖가지의 방편설(方便說)이 있게 된 것이고, 그것이 결국 팔만 사천 법문에 이르게까지 된 것이다.




 끝내 말 길이 끊어진 자리이지만, 말이 아주 없으면 범부의 작은 지혜로는 큰 지혜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에 성인들이 어쩔 수 없이 방편의 말씀을 베풀어 교화문(敎化門)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승법(一乘法)을 '교 밖에 따로 전하는 법(敎外別傳)'이라고 하는 것이니, 밖으로 남의 말이나 문자 속을 뒤지며 자기 안에 이미 구족하게 갖춰져 있는 천진(天眞)한 자성불(自性佛)을 돌보지 않는다면 끝내 외도(外道)에 떨어져서, 설사 아무리 맑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여도 여전히 '문 밖에서 이쪽 저쪽 하는 첨지'라는 핀잔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겠는가?· · · · · · 전에는 물들었다가 지금에서야 깨끗해진 것이니 그 깨끗함에는 시작이 있는 것이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므로 이것은 세속의 생사법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듦'이 곧 '물들지 않음'이요, 번뇌가 곧 보리임을 알아야 '항상 청정함'(常淨)이니, 그제야 비로소 본성품(本性品)에 계합하여 발심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부처는 다시는 더 나아갈 데가 없으니, 허공에 있으면서 나가면 어디로 나갈 것이며, 물러간들 어디에 가 닿겠는가?




 불법, 곧 일승법(一乘法)에선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 것이니, 시작과 끝이 한 때요, 인과(因果)가 동시(同時)라 결코 앞뒤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초발심(初發心)에 문득 불과(佛果)를 얻어서, 다시는 더 수증(修證)하는 일이 없음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이니, 결국 인과 아닌 인과가 불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기하는 구도자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이 일에 다가선다면 더욱 난행(難行)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몇 아승지겁을 지나도 상응할 분수가 없다고 말하는 근거이다.




 사익경(思益經)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그 뜻을 깊이 참구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는 것은 무명중생들로 하여금 생사를 벗어나서 열반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다만 중생 마음속의 생사와 열반이라는 두 소견을 제도하기 위함일 뿐이다.

 곧, 모든 법의 '평등한 모양(平等相)'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일 뿐인 것이니, 이는 미혹한 중생이 허망한 고통에 집착하여 벗어나기를 구하고, 성인의 국량(局量)을 바라면서 헛되이 닦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즉, 그 모두가 움직이는 몸과 마음을 허망하게 붙잡아 '나'로 삼음으로써 일어나는 번뇌요, 정식(情識)의 분별일 뿐임을 밝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