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체중생이 모두 '깨달음의 지위'(覺位)에 있다.
  2. 법문(法門) : 즐겁다고 알고 괴롭다고 아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3. 공안(公案) : '법 없는 법'이 '참 법'이요, '깨달음 없는 깨달음'이 '참 깨달음'이다.
  4. 게송(揭頌) :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곧 불성(佛性)이라 · · · · · ·
 
     
   
     
   

 불가(佛家)에서 흔히 '돌아간다'고 하는 말은 곧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이 말이 그리도 자주 사용되는 것을 보면, 그만큼 만 중생이 자신의 고향인 그 근원을 등지고 객지를 헤매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떠돌이 생활의 가장 큰 이유는, 중생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여섯 감관(六根)'이 모두 그 근원인 '한 마음'에서 일어나지만, 한 번 일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제 근원을 저버리고 '여섯 대경(六塵)'을 향해 내달려 흩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주인이 던진 흙덩이를 쫓아 무작정 내닫는 견공(犬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으니, 자칭 만물의 영장이란 말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목숨의 근원(命根)'까지 통틀어서 모든 육정(六情)을 껴잡아, 그 근본인 '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참된 불자(佛子)의 행리(行履)일 것이니, 이것이 곧 참된 깨달음의 자리이다. 이것은 세속의 상식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은 후에 그 양에 비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자(獅子)는 던져진 흙덩이를 쫓지 않고 그것을 던진 사람을 되돌아 문다 했으니, 이는 올올히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되는 것이요, 많은 노력과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경(經)에 이르기를,· · ·


 ≪선재(善材)는 한 생각에 발심(發心)하자 단박 능·소(能所)가 없었고, 삼세(三世)의 성품을 분명히 알고 보니 성품은 '예와 이제(古今)'에 끊어졌다.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깨닫고 보니, 본래 그것이 바로 부처인지라, 따라서 정각(正覺)을 이루지도 않았고, 보리를 증득하지도 않았다.

 이 몸과 마음의 '성품이나 모양(性相)'에 도무지 증득하고 닦을만한 것이 없다면 이것은 이루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본래 그런 것이다.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혹은 움직이고 혹은 고요하면서, '있고 없음'을 부수지도 않고, 행하는 바의 모든 일이 오직 '지혜'(無作根本智)에서 일어날 뿐≫이라고 했으니, 모든 중생이 앉은 그 자리에서 그저 문득 꿈을 깨면 되는 것이지, 꿈을 깨기 위한 노력 따윈 전혀 까닭 없는 것임을 확연히 알아야 한다.
 
 '그 누구도 부처 아님이 없다'는 소리가 듣기 좋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참으로 절실히 아는 사람만이 부처 참 자식으로서의 공부가 비로소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경(經) 곳처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행여 헛되이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어리석음만은 면해야 할 것이다.


 ≪대저 온갖 법은 항상 정각(正覺)을 이루었고, 일찍이 정각을 이루지 않은 때가 없다. 따라서 무릇 진실한 법은 제 모양을 버리고 다른 모양을 취하는 법이 없으니, 만약 '정각 아닌 것(不覺)'을 버리고 '등정각(等正覺)'을 이룬다면 이것은 진실한 '정각'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중생은 모두가 '깨달음의 지위'(覺位)에 머물고 있어서,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취하는 것이 아니니, 곧 '하나의 깨달음'이 '모든 깨달음'이어서 항상 '정각'을 이루었고, '불각'일 때가 없는 것이다.

 마치 저 허공이 맑고 고요하여, 이루어지거나 허물어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만약 이루어짐과 이루어지지 않음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망정의 소견(妄見)에 속한 것이다.

 만약 지혜로 비추면 어디를 간들 진실하지 않겠는가. 생각생각 마다 항상 법신(法身)을 보고, 티끌티끌마다 불국토(佛國土)를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