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 앎'은 문턱을 넘는 일이 없다.
  2. 법문(法門) :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3. 공안(公案) : '움직이는 것'을 몸과 경계로 삼으면 끝내 전도되어 '참 성품'을 잃으리라.
  4. 게송(揭頌) : 한 법이 형상이 있으면 곧 그대 눈동자를 가린다.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여래가 대중을 향하여 오륜지(五輪指)를 오무렸다 폈다 하시면서 아난에게 말했다.



 ≪『 네가 지금 무엇을 보았느냐?』
  『 여래께서 손바닥을 오무렸다 폈다 하시는 것을 보았나이다.』
  『 네가 내 손이 오무렸다 폈다 하는 것을 봤다 하니, 그러면 '내 손'이 오무렸다 폈다 했느냐, '너의 견(見)'이 오무렸다 폈다 했느냐?』
  『 세존께서 손을 오무렸다 폈다 하셨으므로 저희는 그것을 보았을 뿐일지언정, 저의 '견'은 오무렸거나 폈거나 함이 아니옵니다.』
  『 어느 것이 움직이고 어느 것이 고요했느냐?』
  『 부처님 손이 움직였고 '저의 견'이야 고요하달 것도 없거늘,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할 것 무엇이겠습니까?』
  『 그러하니라. 어찌하여 너희들은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삼고 '움직이는 것'을 '경계'로 삼으면서, 시종일관 생각생각마다 생멸하고 '참 성품'을 등지며 뒤바뀌게 일을 행하면서 '물건'('참 성품' 위에 나타난 業의 그림자)을 '나의 몸'인 줄 잘못 알고, 이 안을 윤회하면서 유전(流轉)을 스스로 취하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견(見)의 성품'은 변하지 않고 '진리'는 '법계'에 두루한데, 다만 '물건'이 '나의 몸'인 줄 잘못 안 탓으로 '깨달음'을 등지고 '경계'에 합해 있을 뿐이니, 만약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삼고, '움직이는 것'을 '경계'로 삼으면 끝내 뒤바뀌게 행하면서 '참 성품'을 잃으리라.


 '경계'는 실로 변천하지 않는데(因緣生起는 無起이다) 다만 '마음'이 망령되이 동요할 뿐이다. 가위 구름이 가는데 달이 움직이고, 배가 가는데 언덕이 옮아간다 하리라.≫



 따라서 논(論)에 이르기를,· · ·



 ≪ '갔음'을 말하나 반드시는 가지 않아서, '예'와 '이제'가 늘 존재함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은 까닭이요, '지나갔음'을 말하나 반드시는 지나가지 않아서, '지금'이 '옛날'에 이르지 않음은 그것이 오지 않은 까닭이다. 오지 않기 때문에 '예'와 '이제'에 쉬이 내닫지 않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문다.


 결국 법과 법은 항상 '진여의 자리'에 머물므로, 일찍이 한 물건도 '가고 옴'이 없고, 한 생각도 잠시를 '머무는 일'이 없나니, 이 모두가 서로 기다리지 않거늘 이 어찌 '불천'(不遷)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만약 이렇게 통달할 수만 있으면 '자기의 눈'이 뚜렷이 밝아지겠거늘, 어찌 거짓으로 있는 듯한 '허망한 경계'와, 서로 다른 여러 학설로 '나'를 미혹되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