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 앎'은 문턱을 넘는 일이 없다.
  2. 법문(法門) :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3. 공안(公案) : '움직이는 것'을 몸과 경계로 삼으면 끝내 전도되어 '참 성품'을 잃으리라.
  4. 게송(揭頌) : 한 법이 형상이 있으면 곧 그대 눈동자를 가린다.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에는 일체의 차별이 다해서, '나'를 포함한 사람도 사물도 전부다 인간의 맹한 의식에 의해서 지어진 환상일 뿐, 실체가 없는 거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게 뭐건 간에 전부다 '내' 어리석은 의식 때문에 생겨나는 환영에 불과한 거요. 이 세상은 본래 이거라고 할 만한 것도, 저거라고 할 만한 것도, 단편화된 어떤 조각도, 어떤 토막도 없소. 그러나 어리석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 눈에는 온갖 이런 것과 온갖 저런 것들이 갈리고 나뉘어져서, 갈등을 말아내고 혼란을 말아내는 거예요. 좋은 인연, 나쁜 인연, 끈적한 인연, 소원한 인연, 이런 것들을 지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몽땅 마음 만으로만 있는 거라 소리요.


 거울 속의 그림자와 그림자가 인연을 맺으면 그게 좋은 인연이오, 나쁜 인연이오?· · · 인연이 본래 인연이 아닌 거예요. 허깨비와 허깨비가 만나 제 아무리 희한한 인연을 지었다한들 그게 전부 생각만으로 그런 것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소리요. 일체 존재가 전부다 딱히 '이것'이라고 지칭할 실체가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무엇과 무엇 사이의 인연'이라는 소리는 전부 헛소리인 거요.· · · 모든 인과관계를 포함한 일체의 '관계'는 인간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그려낸 개념일 뿐, 참 성품자리에는 그런 것 없소.




 참 성품자리엔 일찍이 티끌 하나 움직인 적이 없는데, 그런데 지금 눈앞에 가득한 온갖 소리와 온갖 형상은 무엇인가?· · · 경전에 보면 '부사의 업상(不思議 業相)'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여기서 부사의란 불가사의(不可思議), 이상하다, 묘하다, 희한하다 정도의 뜻으로 쓰인 거요.· · · '내'가 뭔가를 볼 수 있고, '내'가 뭔가를 들을 수 있고, '내'가 뭔가를 알 수 있다는 사실만큼 부사의 한 것은 없소. 본래 근본은 적멸해서 '너와 나'의 차별이 없고, '가고 옮'도 없고 그야말로 적멸 그 자체인데, 어떻게 해서 앎이 있는가? 앎도 형형색색 기기묘묘, 여간 정신 없는 게 아니잖소? 본래 바탕은 적멸한데 그런 모든 현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미혹한 중생은 으레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안다'고 하겠지만, 실상은 오는 데가 없는 거요. 왜 그렇겠소?· · · '나'라는 실체가 없으니, 그렇다면 뭐하고 뭐가 모인 게 '나'요?· · · 밥이오? 반찬이오? 물이오? 공기요? 어디를 찾아봐도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게 진실인 거요.


 '무엇의 성질(性質)'이라고 말할 때, 그 성(性)자를 봐요. '마음 심(心)'에 '날 생(生)'이오. 마음이 지어 나툰 거라 소리요. 다시 말해 '나'를 포함한 모든 성질은 전부 마음이 그렇다고 지은 것일 뿐, 실제하는 게 아니라 소리요.· · · 그 마음으로 하여금 이렇다고 짓게 하고, 저렇다고 짓게 하는 그 창조적인 에너지가 업상이오.


 우리가 뭔가를 보는 것도, 그 보는 게 무엇이건 간에, 이 업 때문에 보는 거요. 그러니 이 부사의 업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럴 뿐인 거요. 다만 미혹한 중생이 모든 행위의 주체가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의 모든 행위는 '내'가 겪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가 지은 울타리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거요. 소위 합리적인 사고(思考)에 근거한 시각으로 볼 때, '이건 이래야 되고, 저건 저래야 되고' 하면서 저만의 틀에 넣어 한정지어 버리는 거요.· · · '나'라는 중심이 보다 나은, 보다 훌륭한, 보다 대단한 '나'가 되기 위해서 마음의 움직임을 자꾸 조작하고 왜곡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거요.


 '나의 시각, 나의 입장'이란 것은 없소. '내'가 없는데 '나의 입장'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소? 그런데도 계속 '내 입장'에서 보건대 '이거는 싫어', '내 입장'에서 보건대 '이거는 좋아' 하면서 괜히 시끄럽게 먼지를 피우고 있는 거요.· · · 이것이 다해 버려야 부사의한 업상이 마냥 꽃피는 거요. 성소작지(成所作智)라, 보면 보는 대로 나타나고 들으면 듣는 대로 나타나서 짓는 바대로 이루는 거요.· · · 과거의 기억이나 지식, 경험에 의지할 때는 유한하지만, 그 모든 게 다해버렸을 때는 그야말로 무한한 에너지 그 자체가 시절과 인연 따라서, 인연만 맞으면 뭐든 짓게되는 거요. 보태지도 않고 덜지도 않고, 참으로 거침이 없는 거요.




 분별하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머물지 말라,· · · 아마 불가(佛家)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이런 것들 일 거요.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도 공부의 진척이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시오?· · · '내'가 그 말을 듣기 때문이오.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내'가 받아 가지기 때문이라 소리요.· · · '절대로 분별하면 안 돼. 집착하면 안 돼. 이건 부처님 말씀이야' 하면서 다지고 다져서 콘크리트처럼 만들어버리는 거요. 일단 그렇게 되면 자기 스스로 그 생각을 털어내기 전까진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믿음을 어쩌지 못해요. 심지어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 죽고 죽이며 전쟁도 마다하지 않지 않소?· · · 분별하는 것은 틀리고, 분별 안 하는 것은 옳다는 요지부동의 분별심이 생긴 줄도 모르고, 자신은 부처님 말씀을 잘 받들어 모시고 있다고 여기는 거요. 그렇게 되면 이게 부처님 말씀이니까 더욱 권위를 가져서, 분별하면 안 된다고 확고히 알아버리는 거요. 그 다음에는 자기만 그러는 게 아니고, 남 보고도 '너 분별하면 틀려. 분별 안 해야 옳아' 하면서 목청을 높인다고.· · · 이거 눈 번히 뜨고 함정에 말려드는 거요.


 일체 만법이 생각만으로 지어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조차도, 그놈의 의식, 소위 자아관념이라는 그 7식이 다하지는 않고, 그 말을 통째로 줏어삼켜 한 편의 지식, 지견으로 꾸역꾸역 배를 채우면서 계속 '자기'를 강화하고 있는 거요. 그동안 줏어먹은 걸 전부다 게워내야 할 판에 더 채워 넣지 못해 안달이니, 이건 거꾸로 가도 한참 거꾸로 가고 있는 거라 소리요.· · · 늘 말하지만, 말이 모자라고 글이 모자란 것이 아니오. 단 한 마디 구절이라도 얼마나 투철히 사무치는가, 아니면 평생 말만 배우다 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 거요.


 일체 허공은 텅 트인 하나여서 거기엔 그 어떤 구분도 분별도 없소. 다만 우리가 뭔가 들어서 알고, 읽어서 알고, 경험을 통해 안 바가 있으면, 그 아는 바가 장애가 되어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등등, 이것과 저것을 계속 난도질하고 갈라놓기 때문에 그 두루한 허공과 통하지 못하고, 고 꾀죄죄한 의식의 궤짝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거요. 그 어떤 획도 허공은 받아들이지 않는데, 제 스스로가 숱한 획을 그어놓고 그 속에 들어앉아 운신을 못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한심한 일이오.· · · 여러분이 옳다고 여기는 바, 그게 뭐건 간에, 여러분의 마음이 이것은 틀림없이 옳다고 여기고 받아들이는 게 있다면 여러분은 그 허공에 상응하기 틀린 거요.




 우리가 쓰는 법 중에 가장 일차적인 것이 이름(名)을 짓는 거요.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편화가 시작되고 따라서 분열이 시작되었다는 소리요. 이름을 딱 짓는 순간, 그것은 그 이외의 것하고는 다르다는 얘기가 되는 거요. 모습(相)을 인정하는 것도 분열이오. 뭔가에 이름을 짓고 뭔가에 모습을 부여하는 그러한 분별이 바로 망상(妄想)인 거요.


 어떤 특정한 대상을 취해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이 전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실체라고 인정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망령된 생각인가를 꿰뚫어보는 게 지혜요.· · · 이 지혜가 밝아져서 모든 한계와 차별성이 전부다 허망하고 어리석은 인간 두뇌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져야 진여(眞如)가 드러나요.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 · · 본래 정한 모습도 없고 정한 성품도 없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시절과 인연 따라서 뭐든지 내는, 내되 하나도 내는 바 없이 내는, 진여가 드러나는 거요.


 분별해서 이름짓고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보세요. "저러면 안 되는데, 이래야 되는데, 쟤는 왜 저래 이렇지 않고",· · · 보고 듣는 족족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 달지 말고 그냥 보라 소리요.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주의력을 기른다든가, 관조의 힘을 기를 필요는 전혀 없소. 전혀 노력이 필요 없는 거요. 어떻게 되어야 할,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 어떤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야심이라든가 개인적인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는 거요. 그냥 완전한 개방이 있을 뿐이오.· · · 선택 없는 관찰.· · · 그 선택 없는 관찰 이외에 다른 길은 없소.


 옛날 성인들 말씀에 "있는 그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지만, 심행(心行)을 일으키면 틀린다"고 했소. 마음으로 뭔가 조작하려고 일으키면 벌써 참된 하나를 등진 거요. 그게 해탈이 됐건 열반이 됐건 초월이 됐건, 뭐든지 마음으로 지으면 어긋난 거요.· · · 모든 것은 있는 이대로인 채로 잘못된 게 없는데, 우리가 지금 미(迷)해서 거기다 낱낱이 이름을 지어, 좋고 싫고, 높고 낮은 구분을 지은 것뿐이오.· · · 절대로 시간도 노력도 필요 없소. 그냥 보시오. 새로 뭔가를 준비할 필요가 없는 거요.




 흔히들 길을 잃었다거나 길을 일러달라거나 하는 말들을 해요. 세속의 눈으로 보면 살다가 길을 잃는 수도 있소.· · · 그럼 왜 길을 잃는 일이 생기는가?· · · 내가 가야할 목적지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오. 목적지가 결정되어 있지 않고 그냥 바람 따라 구름 가듯, 골 따라 물 흐르듯 그렇게 가는 사람한테는 길을 잃는 법이란 없소. 늘 가다가 멈춘 그 자리가 그 자리인 거요.


 '그렇고, 그렇지 않고'는 전부 '내' 마음에 달린 거요. 일체가 유심조(唯心造)라, 만법이 마음으로 지은 바임을 그냥 한 편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 말에 계합(契合)한 사람은 그 스스로가 온누리의 주인공이오. 일체 만법을 능히 내고, 일체 만법을 능히 거두는,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그런 존엄한 존재인 거요.· · · 그런데 지금 어떻소? 무슨 인생살이가 어떻고 저떻고,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지지고 볶고 있으니, 그거 도무지 채산이 맞질 않지 않소?· · · 자기 자신이 일체 만법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전부 제가 낸 경계와 법에 휘둘리고 쓰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