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리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2. 법문(法門) : 알려고 하는 그 한 생각이 바로 진리의 응현이다.
  3. 공안(公案) : 지금 있는 이대로의 온갖 법이 바로 '부처의 길'이다.
  4. 게송(揭頌) : '천진'(天眞)이라 원래 구족하거늘· · ·
 
     
   
     
   

 한 인간이 평생을 바친 엄청난 노력의 결실로 얻어진 이득이나 공덕이 제아무리 대단하고 희한한 것이라도 그게 전부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다를 바 없는 겁니다. 실체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한낱 우리 감정선 상에 나타나는 느낌에 불과한 거요.· · · 여러분이 '오늘 참 기분 좋다, 한 수 했다, 흐뭇하다'고 할 때 그게 전부다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거요. 감정에 의해서 저울질되고 평가되지 않으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전부다 사람의 감정, 인간 정신에 의해서 평가되고, 인간의 인식 작용을 통해야만 그게 이로운 거다 해로운 거다 하고 판별이 나요.

 하지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본리(本利), 즉 '본래의 이익'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인식작용, 다시 말해 사념을 굴리기 이전을 말하는 거예요. 인간이 사념을 굴리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본래적인 무한한 에너지가 한정되고, 그렇게 한정된 채로 평생 꾀죄죄하게 사용하다 마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말에 뜻을 정하죠? 소위 정의를 내리기를 좋아해요, 거의 자동적으로.· · · 여기서 뜻을 정한다는 말은, 한정을 짓는다는 소린데, 하지만 본래적인 것에는 한정된 의미가 있을 수 없소.· · ·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문자를 사용하면서부터 개념이란 것이 생겨난 거요. 인간이 사념을 굴리지 않으면 개념이라는 건 생겨나지 않아요. 여기서 본래적인 것이란 인간이 그러한 개념을 쓰기 이전을 말하는 거요.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문자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은 점점 통제불능 상태로 들어간 거요.




 참된 수행자가 무슨 일을 당했을 때 가장 우선해야 될 일은 '본래의 이익'으로써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오.· · · 본래의 이익은 뭔가?· · · 본래의 이익은 '적멸(寂滅)'이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이오. 모든 언어, 문자개념이 구르기 이전을 말하는 거요.· · · 적멸은 여(如)요. 그럼 이 여여(如如)라 하는 게 무슨 소린가?· · · 작용하기는 하는데 작용하는 주체가 없소. 자취가 없다 이 소립니다.

 작용하려면 반드시 작용하는 '주체'가 있고, '작용'이 있어야 하는 걸로 모두들 알고 있소. 그러나 이 구조 자체가 잘못된 거요. 주체와 객체가 둘이라는, 이 이원성이 해결돼야 합니다. 생각은 주체와 객체가 분열돼야만 구를 수 있소. 주체와 객체가 둘이 아니라는, 관찰대상과 관찰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옛날 선사들이 이런 말을 했소. "네 입술하고 목구멍하고 맞대놓고 말해봐라." 입술하고 목구멍을 맞붙이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 · 나불거리지 말아라 하는 소리요. 머리 굴리지 말라는 소리고.· · · 생각을 굴려서 개념을 끼워 넣으면 본래 이익을 등지는 거요. 놓쳐버린다고.

 이 여여(如如)속에는 일체의 공덕이 갈무리되어 있소. 그게 무슨 학문이 됐건, 이 세상의 일체 자연현상, 인위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것, 훌륭한 생각, 악마적인 생각 따위의 일체가 여기서 나오는 거요. 지금 앞에서 이 말을 알아듣는 그 놈, 그게 바로 여여(如如)요. 거기서 모든 게 비롯되는 거요.· · · 그럼 본리(本利)란 뭐겠소? 본래의 이익?· · · 일체의 공덕장(功德藏)이오.· · · 무슨 일을 당했을 때 그 일에만 국한시켜 문제를 풀려고 하는 한 그 어떤 문제도 해결이 될 수가 없소. 그래서 항상 본래의 이익, 여여한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거요.

 내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있고, 내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없는 거요.· · · 바꿔 얘기해서, 내가 그렇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거요.· · · 그렇고 그렇지 않고는 여여한 근원에서 한 생각 굴러서 생겨난 것이니, 한 생각 구르기 이전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었다는 소립니다.

 산으로 들로 모두 놀러 나가는 이 휴가철에 여러분이 여기 이렇게 온 이유가 뭐겠어요?· · ·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온 거요. 본래의 이익.· · · 그런데 이건 말 그대로 본래의 이익이오. 절대로 밖에서 새로 얻는 게 아닌 거요. 이 본래의 이익은 성인에게 있어서 늘지도 않고, 범부에게 있어서 줄지도 않고, 붓다가 나기 이전이나 이후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거요. 작기로 말하면 겨자씨 속에 들어가서도 사뭇 남고, 크기로 말하면 우주를 통째로 삼키고도 사뭇 여유롭다 하는 얘기요. 한정이 없는 거요.



 여러분 깨닫고 싶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 과연 누가 알고 있는가 하는 소리요.· · · 심리학이 됐건, 철학이 됐건 무슨 학문이 됐건, 어떤 목표지점을 미리 정해놓고 가는 것은 창의적인 태도가 아니오. 어떤 목표나 목적을 정해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은 출발부터 틀린 거요. 왜 그렇겠소?· · · 그 목표나 목적이 어떻게 설정됩니까? 우선 인간이 두뇌를 통해서 많이 고안해야 될 거요. 연구해야 되지 않겠소? 그래서 어떤 이상을 설정하는 것 아니오? 그게 깨달음이 됐건 진리가 됐건 마찬가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진리를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뭐요?· · · 그건 전혀 미지의 세계를 말하는 거요. 알 수 없는 세계.· · · 그건 우리의 지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게 아니고, 본래 알 수 없는 거요. 불가사의의 세계라 소리요. 사량(思量)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오. 분석하고 연구해서 학문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오. 진리는 그런 미지의 세계인데, 이런 미지의 세계가 어떻게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소리요.

 만약 깨달음을 추구한다, 혹은 진리를 탐구한다, 나는 진리를 밝혀야 되겠다고 목적을 세울 때, 여러분이 의식했건 안 했건 여러분 머릿속에는 이미 진리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는 거요. 깨달음이란 이런 거다, 진리란 이런 거다, 궁극적인 초월의 세계는 어떤 거다 하는 등등,· · · 그 동안에 읽고 듣고 나름대로 궁리해서 심상화(心象化)한 이런 것들을 머릿속에 갖고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들을 추구하게 되는 거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추구할 수가 없소.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추구할 수 있는 거요. 전력투구해서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면서 추구하는 거요.

 진리는 세속적인 학문을 하는 자세로 접근하면 틀린다는 걸 깨닫는 게 제일 중요해요.· · · 방향만 바로 잡으면 바로 거기가 거기요. 세수할 때 코 잡는 것만큼 쉬운 거요. 그래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틀린다고 말하는 겁니다.· · · 순서를 밟아서 차례로 점진적으로 기초를 다져가면서 지식을 차곡차곡 벽돌 쌓듯 쌓아서 그 결과로 훗날 깨닫는 것으로 대개들 생각하는데, 지금 하는 말은, 기왕에 그 엄청나게 쌓아 올린 것을 몽땅 허무는 작업이 우선이라 소리요. 허물어도 한 사품에 왕창 다 쓸어버려야 된다 하는 소리요.

 진리에 접근하는 자세는 꼭 한 가지요.· · · 그게 무엇이 되었건, 기존의 지식이나 기억, 어떠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절대 동원하지 마시오.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갖지 말고, 찬성도 반대도 하지말고 그냥 완전히 열어놓고 경청하시오.· · · 그럼 대개들 난감하다 할거요. '찬성도 반대도 하지 말라니, 그게 들으란 말이야 듣지 말란 말이야?' 하면서 속으로 꿍얼꿍얼 하겠지만, 불편하더라도 우선 그냥 열어놓고 들으시오.



 결국 깨달음이 됐건 진리가 됐건 궁극적인 것을 구한다고 할 때, 그 궁극적이라 하는 말에는 시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소. 그러나 진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될 목표지점, 그런 게 아니오. 진리는 항상 지금 여기 있는 거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먼 훗날 내가 알아차려야 될 그런 것이 아니오.

 만약 진리탐구를, 우리가 학문을 성취하듯이 많은 노력의 결과로서 어떤 금자탑에 도달하는 것인 냥 그렇게 안다면, 그건 진리에 대한 나의 심상화에 불과한 거요. 우리가 책에서 읽은 것은 진리가 아니오. 진리는 항상 공기를 호흡하듯 나와 더불어 함께 있소. 나의 일거수일투족, 정신적으로 살풋 굴리는 그 모든 것이 진리 그 자체의 현현인데, 어디서 진리를 따로 찾겠소?

 도는 이미 행해지고 있는 거요. 옛말에 누군가가 도를 입에 담고, 도에 대해서 말을 하고, 도를 추구한다면 그와는 더불어 도를 논하지 말라 했소.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해요. 그래서 지금 하는 말을 세속의 강의나 강연 듣듯이, 세속의 학문 공부하듯이 그렇게 듣는다면 그 출발점부터 전혀 잘못되는 거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투영한 것만을 추구할 수가 있소. 그게 깨달음이 됐건 진리가 됐건, 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 · 진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라 하면서 그 미지의 세계를 수소문해서 가려 한다니 그게 어떻게 가당키나 하겠소?· · · 미지의 세계는 그냥 미지의 세계요. 미지의 세계는 추구할 수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요. 그렇다면 이 미지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오.· · · "추구하지 말라.· · ·"요. 추구하면 틀려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 · "하면 틀린다."
 "어떻게 지향하면 됩니까?"· · · "지향하면 틀린다."

 왜 그렇겠소?· · · 제가 진리를 등지고, 자기가 투영한 환상을 쫓고 있으니까 틀린다 그러는 거요.· · · 아무 것도 축적하지 마세요. 종교적인 경험이 됐건 지식이 됐건 언어가 됐건, 축적해서 그것을 나의 경험이라고 여기면 거기서부터 어긋나는 거요. 경험하는 자가 있고 경험한 바가 있으면, 그 경험이 깨달음이 됐건 진리가 됐건, 부처 위의 또 부처를 만나고 왔건, 그것은 전부 자아를 강화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거요. 모든 경험은 자아를 강화할 뿐이오.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세속적인 바램이었건, 궁극적인 깨달음이었건, 그 모든 바램이 전부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창출해낸 환영에 불과하다 하는 것을 깨달아서, 그 모든 것을 다 놓고, 심리적 육체적 모든 긴장도 다 풀고, 그냥 물 흐르듯, 삶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뿐인 줄로 알고, 깨달음 따위는 입에도 담지 않고, 그렇게 갈 때, 그 때에 곧 머지 않아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