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용이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가 됨이 없다.
  2. 법문(法門) : '체험한 나'와 '체험한 바'가 있으면 여전히 둘째 자리다.
  3. 공안(公案) : 본체와 작용이 모두 아니니,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린다.
  4. 게송(揭頌) : 범부가 성인이요, 성인이 범부이니· · ·
 
     
   
     
   

 중생은 의식의 범주 바깥에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없소. 이것은 다시 말해 인식작용을 통해서는 '참 성품' 자리에 계합할 수 없다는 소리요. 그래서 문(門)이 없다는 소리도 하는 겁니다.


 의식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은 반드시 잔재(殘滓)가 남습니다. 이 길을 가는 많은 수행자들이 오랫동안 열심히 법문도 듣고 참선도 하고 그밖에 좋다고 하는 온갖 방편에 의지해서 애써 갈고 닦고 해요. 그리고 그 결과, 그에 따른 수확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 그럼 '결과'라는 건 뭐예요?· · · 내가 지은 원인 행위에 대한 찌꺼기가 바로 결과요.· · · 잔재라고, 잔재.· · · 본래 한 마음뿐인데, 이런 그림자놀이를 통해서 어떤 그림자를 남겨두려고 하는 겁니다. 실체가 없어요. 전부다 마음에 의해서 인식되어져야 원인도 있고 결과도 있는 거요. 원인과 결과가 전부 한 마음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소립니다.

 원인과 결과 관계는 시간 관계요, 또 주체와 객체를 놓고 보면 공간 관계인데, 이러한 공간적인 벌어짐이나 시간적인 벌어짐이 전부다 한 마음이오. 제가 둘로 펼쳐놓고, 제가 다시 합치고,· · · 그러고 있는 것뿐이오.


 흔히 무소득(無所得)이니 무소주(無所住)니 하는 말을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것은 '내'가 탐내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립니다. 무소득인 사람은 상실의 아픔이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얻은 바가 없으니 버릴 것도 없기 때문이오. 중생들이 궁극적으로 잃어버릴까봐 겁내하는 게 뭐요?· · · 목숨이지요? 그러나 '내'가 없으니 '내 목숨'이라는 것도 없는 거요. 그게 무소득이오.

 '무소주'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간직하고 있는 관념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복종하고 있는 법이 없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법칙성이 없는 거요. 내 마음은 그냥 자유로운 본래의 마음 그대로일 뿐 그 어떤 논리체계도 가치체계도 받아들여 간직하고 있지를 않는 겁니다.

 우리가 그 동안에 배우고 듣고 한 것을 전부 종합하고 체계화해서,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행동의 지침으로 삼으려고 하는 신조나 신념, 철학이니 인생관이니, 물질관이니 우주관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 '소주(所住)'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은 모든 교육, 내가 축적한 모든 경험, 내가 쌓아올린 모든 지식, 이런 것들이 전부 소주요.· · · 머무는 바. '나'는 늘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거요.

 앞서 말한 체험은 결국, 체험을 한 놈과 체험되어진 바가 여전히 둘로 갈라져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것은 소유하는 '나'가 있고 소유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거요. 머무는 '나'가 있고 머무는 바가 있고, 또 주체가 있고 객체가 있어서 그 둘이 늘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결과를 취하려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 · 뭔가를 체험하고 싶은 게 누구예요?· · · 만약 체험했다 해도, 뭔가를 체험하는 '나'가 있는 한, 여전히 주관과 객관이 분열되어 있는 거요.


 어떻게 하면 그 '나'로 하여금 체험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나'로 하여금 체험하지 않게 한다하는 건, 그냥 문을 활짝 열어놓고 모든 일, 모든 알음알이, 정신작용, 감정, 그 모든 게 그냥 강물 흐르듯 내 마음 한 가운데를 꿰뚫고 흘러 지나가도록 그냥 두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하나 붙잡고 마음에 든다 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거나 한다면, 그것은 그걸 보고 관찰하는 '나'가 있는 겁니다. 관찰자하고 관찰 대상이 이렇게 분열되어 있으면, 이 관찰자는 반드시 관찰대상을 취하거나 버리거나 하게 되요. 그리고 마땅하다 마땅치 않다 하는 결론을 만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관찰하는 자가 체험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거요.

 그러니까 체험하는 자가 있으면 틀려요. 여러분이 가령 무소득이나 무소주의 경지를 체험해서 아주 고요한 경지가 됐다고 합시다. 그렇게 적멸한 경지가 됐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그 적멸한 경지를 체험해서 인증하면 그건 아직 고요한 게 아니오. 내 마음이 투영했던, 고요하다는 이름의 어떤 의식의 상태일 뿐인 거요.


 결국 몽땅 한 마음뿐인데, 어리석은 중생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체험하려고 하는 거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알아보려 한다 소리요. 그렇게 해서 설사 알아보고 체험하고 했다 하더라도 그건 무의미한 거요. 그건 꿈속에서 한 마음이 두 가닥을 지어놓고, 서로 쫓고 쫓기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이 모든 체험, 그게 세속적인 체험이든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는 종교적인 체험이든 어떤 체험이었건 간에, 체험한 바가 있다면 그건 여전히 의식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거요. 그건 자기가 투영한 환영을 쫓고 있는 것이니, 그 환영이 아무리 이상적이고 훌륭한 거라고 해도, 또 그렇게 해서 그 환영을 붙잡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무 이득도 없어요. 괜히 정신만 산란하게 한 것뿐이오. 진리를 발견하는 길은, 찬성할 것도 없고 반대할 것도 없고,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고, 체험할 것도 체험 안 할 것도 없고, 그저 본래 그대로 환히 밝을 뿐입니다.


 뭔가 체험하고 싶어서 애태울 때에 그 마음을 가만히 봐요. 체험하고 싶어하는 게 누굴까?· · · 뭔가 체험하고 싶다, 도달하고 싶다, 이루고 싶다 하는, 그 '싶어서' 애 닳을 때에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정신작용임을 알 수 있소. 우리의 정신, 다시 말해 우리 의식이 하는 일은 그게 긍정적인 일이건 부정적인 일이건 쓸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게 전부 빈 이름뿐이고 말뿐이오. 의식이 그렇게 지어놓고는 또 의식이 그걸 이루겠다고 헐떡거리고 있으니,· · · 밤낮 해 봤자 제가 갈라놓고 제가 합치려 하는 헛짓인 거요. 꿈속에서 아무리 식은 땀 흘리고 애써봐야 모두 꿈일 뿐이요. 의식이 하는 일이 전부 그거요.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헐떡거리는 거나, 출세간적인 어떤 목적을 정해놓고 헐떡거리는 거나, 헐떡거리긴 다 마찬가지요. 제가 저를 속이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겁니다. 그 모든 게 전부다 오직 마음뿐이오.


 여러분, 지금 마음뿐인 법을 배우는 거 아니오? 마음뿐인데, 한마음뿐이라면, 한 법뿐이라면 누가 무엇을 체험해요?· · · 누가 뭐를 얻고, 그로 말미암아 되어야할 것은 또 무엇이겠소? 지금 얻는다는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소리입니다.

 지금 이 단계가 되면, 뭔가를 지향하고 뭔가를 추구하는 그 놈을 봐야 해요.· · · 그래서 만약 뭔가를 지향하고 있고, 뭔가를 추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 · 아마 십중팔구 그걸 못하게 하려고 할거요.· · ·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게 바로 또 추구하는 거요.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게 지향하는 것이고.· · · 절대로 조작하면 틀려요. 그냥 봐요, 그냥. 벗어나기 위한 노력 자체가 의식의 노력인 거요. 그저 쉬세요. 모든 긴장도 풀고 모든 애태우는 것도 다 놓고, 지금 그 자리에서 죽어 마쳐야 돼요.


 의식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구르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지금 그 본래의 모양을,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되찾고 보면,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드러납니다. 뭘 묘하게 관찰하는가?· · · 지금까지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온통 울퉁불퉁했는데, 가만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봤더니,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게 전부다 내가 지은 거지, '그놈'은 언제나 그냥 거기 그대로 있었다는 거요. 그것을 확실히 보고 나면 높고 낮은 것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이롭고 해로운 것도 없이 모든 게 평등한 거요.· · · 모든 게 평등하니 지금까지 바깥 경계를 향해 날뛰던 그 마음이 잠잠해지고, 열나게 애쓸 것도 없고, 영악하게 굴 것도 없고, 기를 쓸 것도 없으니, 그냥 자연스레 고요해 지는 겁니다.


 모든 게 마음뿐이오. 마음뿐인 거 같으면, 그 마음을 짓는데 누가 어떻게 방해를 하겠어요? 지금까지 이래서는 안 되고, 이래야 되고,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내 자신이 정해 가지고 내 마음에 내 스스로가 굴레를 씌워놨기 때문에 그 마음의 흐름이 자유롭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 굴레가 전부다 의미 없는 것이요, 혼몽한 환영 속에서 만들어낸 거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아서 그걸 전부다 벗어 던지면, 마음이 짓는 대로 현현됩니다.· · · 그러면 또 이러한 경지가 탐날 거요? 이 탐난다는 게 무슨 뜻이오? 뭔가 탐나는 게 있다는 건 아직도 평등성지(平等性智)가 아니라는 뜻이오. 평등성지가 이루어진 사람만이 이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는 겁니다.

 갖고 싶은데 내 뜻대로 잘 안 되니까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하는가 하는 그런 마음을 우리는 마냥 굴렸었는데, 평등성지가 드러나면,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안 갖고 싶은 것도 없고, 그냥 모든 게 평등해서 애태울 게 하나도 없는 거요. 그러니 힘들일 일도 없고, 힘 안 들일 일도 없고, 그저 마음뿐이고 모두가 내 살림살이인 겁니다.


 평등성지가 이루어지면 내 내면세계의 모든 갈등은 다 해소됩니다. 모든 대립, 모순, 갈등, 가능, 불가능, 그런 게 전부다 해소됩니다. 오직 한 마음이 하는 것뿐이오.

 한 마음이 생각을 내는 데는 전혀 노력이 필요 없어요. 이것은 마치 둥글고 밝은 거울이 삼라만상을 가감 없이 비추어내는 거와 같으니, 거울이 뭔가 비추면서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일은 없는 겁니다.

 이제 그것을 다시 이 세상에서 쓰려면, 지어서 써야하겠죠? 본래 마음자리에서 보면, 인식하는 게 인식하지 않는 거요. 인식하는 자도 인식하는 바도 전부다 이 거울 속의 그림자입니다. 열나게 인식작용을 해서 상세하게 분별해서 취하고 버리고 한다해도, 이미 거기엔 취하고 버리고 하는 놈도 없고, 취하고 버리고 하는 대상도 없는 게 진실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내 말을 듣고 뭔가 얻은 게 있다면, 그것은 또 마음 밖에서 뭔가를 얻은 것이요, 또한 내가 주지 않은 것을 취한 것이니, 여러분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를 범한 거요.· · ·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소. 그래서 내가 한 말 알아들으면 '들여우'라 하는 소리를 새삼 명심해야 합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성품은 멀어지고, 찾으면 찾을수록 잃고,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더뎌집니다.

 일상사가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고, 근심스럽고 속상하고 불안하고 등등 할 때, '내 머리가 열심히 구르고 있구나', '과거에 지은 업대로, 습관대로 구르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그 깨달음의 본체인 '나'도, 깨달음의 대상도 완전히 자취가 다해버리는 겁니다.

 절대로 이름을 짓지 마세요. 괴롭거든 모름지기 그냥 괴로워하세요. 괴로움을 그냥 보세요. 괴롭다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이미 괴로움으로부터 도피과정이 시작된 겁니다. 혹시 또 '나는 자동적으로 도피하는데· · · '하고 걱정할 거요. 그래도 그냥 보세요. 괴로움이라고 이름을 짓고 괴로움에서 도피하고 있는 자신을 그냥 자각하세요. '내 머리가 지금 굴러서, 저것을 괴롭다고 짓고 괴로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구나'하는 그것을 직시하여 있는 그대로 보는 그 과정에서, 괴로움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그 생각도 전부 한 마음이 일으키는 장난이라는 게 확연해집니다. 그것은 '내'가 경계를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하고 조작한다는 너무 당연할 것 같은 구도가 이미 말끔히 다하고, 영롱한 깨달음의 성품이 고요히 빛을 놓고 있는 자리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