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완전한 관찰
  2. 법문(法門) :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관찰의 현장에 관찰자로서의 ‘나’가 없는 것이다.
  3. 공안(公案) : 물·아(物我)가 일여한 뜻은 산천을 주유(周遊)하는 참 멋이로다.
  4. 게송(揭頌) : 모든 법이 평등한 줄 알면 홀연히 거뜬하고 쾌락하리라.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과거의 기억이 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에 근거해야만 그와 비교하여 이렇게 혹은 저렇게 '대상을 알아본다'는 작용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그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옛 기억을 되말아내는 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앞세운 인식작용에만 의존하는 관찰을 통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진실하고 전면적인 통찰이 있을 수 없다.

 주관과 객관, 이 양자의 거리가 소멸됨으로써 '관찰자의 입장'이 말끔히 사라지고 '관찰대상'만이 남게 될 때, 이와 같은 '완전한 관찰' 속에서만이 참되고 생생한 '전면적인 자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관찰자로서의 '자아의 중심'이 소멸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관찰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를 일러 현량(現量)이라 하는데 이것은 마치 맑은 거울이 어떠한 형상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처럼 꽃은 꽃으로 보고, 노래는 노래로 듣고, 냄새는 냄새로 맡고, 또 굳은 것은 굳은 대로 느껴서 조금도 분별하고 미루어 구하는 생각이 없음을 말한다.

 이에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밖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깨달으면 여실하여 세상사가 영원히 쉰다"고 했으니, 여기서 '여실함'(如實)이란, 모든 것이 서로 다르지 않아 동·이(同異)가 원융(圓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어 이르기를,· · ·

 ≪대저 '부처 지혜'는 깊음도 아니고 얕음도 아니며, 멀고 가까움이 아닌데, 범정(凡情)이 헷갈리면 '멀다'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니, '정'(情)이 다하고 '지혜'가 나타나면 원래가 '하나의 체성'인지라, 따라서 '멀고 가까움'이 아니다.

 '부처 지혜'가 나타나고, '마음'을 깨쳐서 '본체'가 나타나면 '지혜'가 원만하여지기를, 마치 거울이 깨끗해지면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본체 위에서 비추면 '앞과 뒤'가 아니고, '새 것'과 '옛 것'이 아니어서, 다만 고요히 비추면서 맑디맑다.

 "남(他)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않는다" 함은 '지혜 몸'(慧身)을 이루는 것이니, 이 '혜신'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본체'를 바탕 삼아서 일어난다. '심성'(心性)을 보았으면 어찌 '다른 것'이 있겠으며, 만약 '다른 것'이 있다면 어찌 '깨달음'이라 하겠는가. 이미 '심성'이라면 '자기'도 또한 존재하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능히 스스로 알므로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한다.≫ 고 하였다.

 천진(天眞)한 어린 아기의 마음처럼, 아무 것도 바라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없이, 물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도 없이, 목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있는 그대로 잠잠히 지켜보는 것, 그것이 이 공부를 지어가는 첫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잘난 일이건, 못난 일이건, 비판하지도 말며, 정당화하지도 않으면서, 나와 남의 모든 일을 그저 무심히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은 어느 사이엔가,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환히 비추면서도 늘 고요한 마음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