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용이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가 됨이 없다.
  2. 법문(法門) : '체험한 나'와 '체험한 바'가 있으면 여전히 둘째 자리다.
  3. 공안(公案) : 본체와 작용이 모두 아니니,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린다.
  4. 게송(揭頌) : 범부가 성인이요, 성인이 범부이니· · ·
 
     
   
     
   

 우리들은 사물을 관찰할 때에 이를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호관계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너무나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物)과 '일어나는 일'(事)들은 모두 <주어 + 술어>의 형식으로 기술되며, 이와 같은 습관이 오랜 세월 동안 일반화되고 상식화됨으로써 우리 인간은 점점 더 존재의 실상을 등지고 허망한 환상의 미로를 헤매게 되었다.

 이와 같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보이는 중생의 관찰구도의 그릇됨을 깨우쳐, 이것과 저것이 나뉘기 이전의 평등한 '참 성품자리'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많은 성인들이 한결 같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했지만, 모든 법의 실상을 밝혀 그 철옹성 같은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참으로 떨치고 나서는 수행자는 흔치 않다.


 경(經)에 이르기를 법의 평등을 깨치면 곧 '벗어남'(出離)이라 하였다. 이는 모든 법이 마치 곡두의 모양과 같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인연을 잘 살펴서 분별하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다. 흔히 미혹한 중생은 둘이 아닌 도리를 들으면 또 다시 만법의 평등함만을 내세우니, 이것이 여전히 둘 사이의 분별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경(經)에 이르기를, · · · "작용은 바로 고요함이요, 고요함이 바로 작용이다. 작용과 고요함은 체성이 동일하여 같은 데서 나왔으면서 이름만 다른 것이니, 다시는 작용이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가 됨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 이르기를 "평등한 깨달음(等覺)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세우니, 마치 거울이 온갖 형상을 비추면서도 거울의 공허가 비침을 잃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곧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함을 이르는 것이니, 인연으로 나는 모든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진실한 모양(實相)을 관하기 때문에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하다는 뜻이다. 이야말로 천가지 차별과 만가지 작용이 모두 형상도 구별되고 이름도 다르지만 이것이 다 하나의 '참 마음의 체성'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하열함(下劣)을 버리고 훌륭함(殊勝)으로 나아가거나, 다름(異)을 싫어하고 동일함(同)을 기뻐하거나, 더러움과 깨끗함을 평등하게 하려 한다면 이야말로 모양만 바꾼 또 다른 미혹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조론(肇論)에 이르기를, · · ·

 『 경전에서 "모든 법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 어찌 오리 다리를 잇고 학의 다리를 자르며(續鳧截鶴), 큰산을 쓰러뜨려서 골짜기를 메운 연후에야 다름이 없다 하겠는가. 반야(般若)와 모든 법은 그 모양이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不一不異)

 만약 이와 같이 '같음과 다름의 두 문'(同異二門)을 분명히 통달하면, 모든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중생이 제도되거나 제도되지 않거나, 있고 없음과 높고 낮음 등에서 모두 의심이 끊어지리라. 만약 동일함에 집착하면 고요함에 걸리고, 다름에 집착하면 둘로 나누어지리니, 따라서 이 '같음과 다름의 두 문'에 미혹되면 모든 지혜가 결코 자유롭지 못하리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