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8월 5일부터 한 주일 동안 베풀어졌던
정진법회에서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말'이라는 게 그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거론된 소재도 알맞아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매우 감명 깊게 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 말은 일단 '잘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보통의 경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을 한 사람의 '본래의 뜻'이 그저 단순히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주고, 깊은 인상이나 심어 주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이른바 <합리적인 사유로는 미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데 뜻이 있었다면, 문제는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다시 말해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그것>을 ― 어쩔 수 없어서 ― 말로써 전하려고 하는 것이니, 따라서 말을 듣는 사람은 단지 그 '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에 닿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국 알아들어도 틀리고, 알아듣지 못해도 틀리는 게 바로 '법문'(法門)인 셈입니다. 그러니 「소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지요.

공연히 첫머리부터 글 읽을 흥미마저 앗아 버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뜻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얻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그는 바로 <알고 모르는 데 속하지 않는 '그것'>을 환히 깨침으로써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알지 못할 것이 없는 '묘하게 밝은 깨달음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 지혜'요, 모든 사람에게 본래부터 고루 갖추어져 있는 '신령스러운 광명'(靈光)인 것입니다.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애써 갈고 닦을 것도 없이, 다만 중생들의 망식(妄識)만 제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활짝 드러난 게 바로 여러분의 '참 마음'입니다. 비유컨대, '거울'은 <형상이 없이 맑기만 한 '비추는 성품'>과 거기에 비추어진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바로 그 '비추는 성품'이 여러분의 '본래 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나 '글'을 비롯해서, 그 밖의 모든 형상이 있는 것들은 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구요. 따라서 거기 무엇이 비치건, 그 '비추는 성품'이야 영겁토록 변하는 일이 없지요. 그것이 곧 '참 마음'입니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없다는 것도 없어서 그저 항상 여여(如如)할 뿐입니다.

이 영롱한 '앎의 성품' 가운데는 본래 티끌 하나 없는데, 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이렇게 글을 쓰는 자도 나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나투고, 나아가서 산하대지 삼라만상을 고루 나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몽땅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자체의 성품이 없는 허망한 것들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것들을 실체인 줄로 오인해서 집착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림자'에 무슨 생각이 있고, 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을 몽땅 꿈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바라건대, 이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그 천 년 묵은 꿈에서 훌쩍 깰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그 지미(至美) 지선(至善)한 경지를 잠잠히 밟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리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한마디만 더 첨언하죠. 이 책을 출판함에 있어서 출판사나 신문사 쪽에서 저자의 프로필을 알려달라고 거듭 요구했었는데, 그걸 물리치느라고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다시 한번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말에서 유추해 보면 아시겠지만, ― 저는 이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아무 공(功)도 없습니다. 이 모두가 오직 영성(靈性)의 응현(應現)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 이 허깨비 같은 몸에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 이 말만 이해되면 이 책을 다 읽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모든 공부를 끝내고, 몰록 '깨달아 들어갈 문'을 얻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2001년 9월 15일
저 자 ; 대 우(大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