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연을 만나서 이 세상에 몸 받고 태어나면 일정 기간 동안 '삶'을 영위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육신이 허물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삶과 죽음'(生死)에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통념이다. 이렇게 한정된 시·공(時空)의 틀에 갇힌 채, 그저 매일 같이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무미건조한 삶을 살다가 때가 되면 ― 전혀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 죽어야만 하는, 이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다.

결국 나면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니, 인간에게 있어서 이 '생사문제', ― 그것도 전혀 해법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체념하고 살 수밖에 없게끔 강제하는, 그러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죽음'을 회피하고, 보다 오래, 또 보다 안정된 '삶'을 위해 추악한 각축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 이 '생사문제'만큼 큰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만약 진실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이야말로 이 '삶' 자체가 바로 질곡(桎梏)이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실로 천행으로 '불법'의 수승한 인연을 만나서, 이미 '연기법'(緣起法) 의 미묘한 뜻도 알았고, 마침내 '생멸 없는 도리'(無生法忍)마저 밝혀낸 바 있다. ― 그리하여 지금껏 숙명으로만 알았던 '삶'과 '죽음'이 전혀 인연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나타난 꿈속 같은 일이었을 뿐, 거기에 본래 '삶의 주체'도 '죽음의 주체'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이 보다 더 희유(稀有)한 일이 다시 또 어디 있겠는가?

영가(永嘉) 현각(玄覺)이 조계(曹溪)에 가서는, 인사도 갖추지 않은 채 석장(錫杖)을 짚고,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주위를 세 바퀴 도니, 육조가 말하기를, ···
  『 사문(沙門)은 모름지기 삼천 가지 위의(威儀)와 팔만 가지 세행(細行)을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은 어디서 온 사람이기에 그렇게도 대  단한 거만을 부리는가?』 하였다.
이에 영가가 대답하기를, ···
  『 '나고 죽는 일'이 큰 일이고, 세상사의 '무상함'(無常)이 너무나 빠릅니다. 』 하니, 육조가 말하기를, ···
  『 그렇다면 어찌하여 '생멸 없는 도리'(無生法忍)를 체득하여 '빠름도 없는 도리'(無時之門)를 깨닫지 않는가? 』 했는데, 이 말에 영가가 대꾸하기를, ···
  『 '본체'는 생멸이 없고, '깨달음'에는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
  『 그렇다. 옳은 말이다.』
그제야 영가는 비로소 위의를 갖추어 절을 하고는, 이어 곧바로 떠나려고 하니, 육조가 말하기를, ···
  『 너무 빠르지 않은가?』
  『 본래 움직임이 아니거늘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 움직임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아는가?』
  『 어진 이(六祖)가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 그대는 <남이 없는 뜻>을 매우 잘 아는구나.』
  『 이미 '남이 없다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 '뜻'이 없다면 어떻게 분별하는가?』
  『 분별도 역시 '뜻'이 아닙니다. 』 하니 육조가 탄복하며 말하기를, ···
  『 착하고 착하도다!』 했다고 한다.

우리는 앞에서, 「만법이 남(生)이 없어서, '성품'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말할 때, 이와 같이 밝히는 이 '지혜'도 역시 '남이 없는 도리'를 따라 <남이 없이 난 것>임을 알아야 비로소 <부처 집안의 참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알았다. 만약 이와 같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 나지 않으면 '불법의 맥'도 영영 끊어지고 말 테니, 이것만으로도 '불법'이 얼마나 철저한 길인지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온갖 법이,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그 모두가 <남이 없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경계'를 상대하여, 다시 이차적으로 말아낸 바 모든 '언어'나 '문자'에 다시 또 무슨 '뜻'(意味)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야말로 '뿌리 없는 나무'가 무성하게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 것과 다를 것 이 없으니, 만약 공부하는 사람이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본다면, 이야말로 스스로 <말 길이 끊어지고, 문자도 세울 수 없는 청정한 자리>가 현전할 것이며, 이런 말도 물론 붙을 여지가 없을 것이다.

진실이 이렇다면, 그 동안 학인이 애써 참구하여 얻은 '지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일체법이 본래 생멸이 없고, '성품'도 '모양'도 다 빈 것이다」, 「'번뇌'가 그대로 '보리'요,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다」, 「'생사'가 본래 생사가 아니거늘, 어찌 다시 '생사'를 여읠 일이 있겠는가?」 ― 이와 같이 호기 있게 갈파(喝破)하기는 했는데, 이 모두가 다만 저 하늘가에 울림도 없이 흩어지는 메아리와도 같은 것이라면, 과연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의지할 데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예부터 선현(先賢)들은 한결같이 「고기를 잡았거든 통발은 버려야 하느니라」고 경책하면서, 학인들이 지견 놀이에 빠지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어떤 스승은, 제자가 그 동안 장만한 제 살림살이를 드러내기를, 「하나의 참된 법계를 손아귀에 거머쥐고 보니, 천지간에 '부처'도 없고, 제도되어야 할 '중생'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자, 잔뜩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하기를, 「입이 큰 줄만 알았지, 꼬리가 질질 끌리는 줄은 모르는구나」 했다고 한다. 왜 그럴까? ― 이 구석 저 구석 허물을 따지는 것은 그만 두고, ― 과연 지금 그가 딛고 서 있는 자리가, 그의 말처럼 그렇게 활연(豁然)하고, 금강(金剛)같이 견고한 자리일까 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거침없이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말은 하는데, 만약 진실로 그렇다면, 막말로 어느 날 염라대왕(閻羅大王) 차사(差使)가 문득 머리맡에 와 버티고 서서 저승길을 재촉할 때에도 과연 그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 ― 제가 저를 속여서 어쩌겠는가?

여기, 타고난 성품이 원래 총명하고 날카로워서, '불법'에 관한 식견이 걸림 없기로 가근방에 소문이 자자했던 원오(圓悟)라는 젊은 선승이 있었다. 그는 안팎의 이목을 한 몸에 느끼면서, 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던 터라, 당대의 내로라 하는 대덕들도 그를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끝에 법연(法演) 선사의 법회에 이르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여전히 겸양한 태도를 보이지 않자, 법연이 내뱉듯이 말하기를, 「 네가 비록 이론으로는 막힘 없이 말을 잘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생사를 대처 할 수 없다. 훗날 죽을병에 걸려서 네 스스로 체험해 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을 가던 중,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때마침 그 마을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온 마을에 성한 사람이라곤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그 자신도 병을 얻어서, 아무도 돌봐줄 사람도 없이 혼자서 사경을 헤매다가 문득 법연선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너무도 놀랍고 뉘우쳐져서, 병이 나은 다음 법연에게로 돌아와서 깊이 참회하고, 십 년을 그 밑에서 머물다가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 이 원오극근(圓悟克勤)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화두이다.

고인이 이르기를, 「털끝만큼 어긋나면 하늘과 땅만큼 막힌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정식(情識)에만 의존하면서 섣불리 성인의 말씀을 요량(料量)하는 것으로 마치 다 된 듯이 교만을 떨 수 있겠는가? ―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면 과연 그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이 '삶'이 그대로 '죽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비록 외양은 다르지만 그 근본은 '하나'라는 뜻이 된다. '산 사람'은 눈과 입과 뜻을 굴리면서 온갖 것을 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데, '죽은 사람'은 눈도 입도 없고, 따라서 당연히 뜻도 없을 테니, 어찌 보고 듣고 깨닫고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두 경우가 조금도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가히 점입가경이라 할 만하다.
 
일정 기간 '삶'이 이어지다가 이 '삶'의 끝이 곧 '죽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하나의 법계'를 밝힌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삶'과 '죽음'이 마치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진(寫眞)을 봄에 있어서 '음화'(陰畵)와 '양화'(陽畵)는 불가분의 것인데, 그 중에서 우리가 다만 관례에 따라 '양화'만을 '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보통 대하는 것이 '양화'뿐이기 때문이다. ― 이쯤에서 '산 자'의 '포지티브'(positive)와 '죽은 자'의 '네거티브'(negative)를 사고실험(思考實驗)하듯이 한 번 겹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지금껏 드러난 모양에만 국한되던 '산 자'에 대한 인식이 어떤 모양으로 변모할까? 이 시도는 우리들의 안목에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은밀한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과연 어떤 '모자이크'가 나올까? ···「환히 보고 듣고 알기는 하는데 식심(識心)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 어떤가? 너무도 생소한 그림이 아닌 가? 혹은 「눈도 귀도 없는 사람이 환히 보고 듣고 한다」, 「환히 보고 듣고 하기는 하는데 그 마음은 캄캄하기만 하다」 ··· 이런 말들이 전혀 생소하지 않게 들리는 경우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도 닿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도 전혀 막히거나 얽매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마음에는 전혀 아무 자취도 남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 이것이 곧 '정'(定 negative)과 '혜'(慧 positive)를 가지런히 닦은 보람으로 '적조의 힘'(寂照力)이 무언의 미소로 배어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것이 바로 전혀 타(他)에 의지하는 일이 없이 항상 스스로 환히 아는 '신령한 앎'(靈知)이, 다만 그저 드러내기만 하는 '신령한 빛'(神光)을 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작용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의 적·용(寂用)이 걸림 없는 작용이 현상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인데, 사람들의 눈에는 다만 그 드러난 모습, 즉 '포지티브'한 면만 보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설사 공부하는 사람이 이렇게 정교하게 살펴서, 한 점 빈틈없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졸장부 소리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끝내 깨끗이 다해 마쳐서, 다해 마친 것조차도 다하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땅'을 밟을 수 있겠는가?

 
현사(玄沙)가 어느 날 상당하여 시중(示衆)하기를, ···

  『 '죽은 중'의 면전은 바야흐로 눈에 뜨이는 그대로가 '보리'(菩提)요, 만리에 뻗은 '신령한 광채'(神光)는 '정수리 뒤'(頂後)의 모습이니라. 』 했다고 한다.

나중에 법안(法眼)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죽은 중의 면전은 눈에 띄는 그대로가 '보리'라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
  『 바로 그대의 면전이니라. 』 했는데, 그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재차 묻기를,
  『 죽은 중은 천화(遷化)해서는 어디로 갑니까?』
  『 '죽은 중'이 어찌 일찍이 '옮기고 변화한 일'(遷化)이 있겠는가?
  『 그러나 지금에 현실로 일어나는 일이야 어찌 하겠습니까?』
  『 그대는 '죽은 중'을 알지 못하느니라. 』 했다고 한다.

법진일(法眞一)이 이 화두를 들고(拈) 다음과 같이 송했다.

  산 사람의 길 위에 죽은 중이 있어서
  육식
(六識)의 공용(功用)이 없어 행하지 않네.
  눈에 띄는 대로 캄캄하니 어떻게 가려내랴?
  밝고 밝은 한 낮에 삼경
(三更)의 종을 울린다.

이제 '삶'이건 '죽음'이건 결코 그것을 정식(情識)으로 헤아리면서 결정해(決定解)를 지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온 천지가 오직 '하나의 법계'일 뿐이니, 살아도 죽어도 '전체 기틀'(全機)이 나타날 뿐이며, 거기에는 등짐(背) 도 향(向)함도 없다. 당장에 몰록 알아차리기만 하면 한 올의 실도 막히지 않아서, 오직 순일(純一)한 마음이 항상 올올할 뿐이다. 따라서 <생사에서 벗어나야 한다>커니, <생사가 본래 생사가 아니거늘, 벗어나야 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하는 따위로 쓸데없는 의논만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정한 적멸락(寂滅樂)을 점점 더 등지는 일일 뿐이니, 그저 평상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만 하겠는가? ― 어제는 비가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개었다. ― 이와 같이 그저 평상하게 사실대로 볼 뿐이요, 남의 말 따위를 상관해서 무엇하겠는가.
 
요컨대, 매사에 얽매임이 없기만 하면 자연히 쇄락(灑落)하게 벗어나서 남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주먹을 불끈불끈 쥐어 보이면서 '큰 작용'(大用)을 들먹이게 될 터이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모름지기 진정한 '본분납자'라면 오직 생각에 즉해서 생각이 없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