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오온(五蘊)의 쌓임'이 본래 비어서 나(生)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 '일체법'이 모두 성품이 없어서 상대가 몽땅 끊어지고, ― 이렇게 안팎에 도무지 의지(依支)가 없는 가운데 본래 움직임 없는 '참 마음'의 '제 성품'이 저절로 환히 드러난다. ―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기식(氣息)은 완전히 다하지 않는 법이니, 다시 말해서, 비록 망식(妄識)이 잠잠해지기는 했어도 '마음의 움직이는 모양'은 이어지는 것이다. 마치 물결은 잠시 잔잔해졌다가도 '물' 자체의 본래적인 유동성은 인연만 만나면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출렁이듯이,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오랜 공부 끝에 온갖 번뇌의 성품이 빈 줄 보아서, 생멸 없는 '본래 마음'을 밝혔다 하더라도 <'마음'의 작용 없는 작용>은 인연에 맡겨서 더욱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말이다. 만약 작용이 아주 없다면 죽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을 밝혀서, 마냥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기만 하여 분별 망상이 나지 않게 되면, 마침내 온갖 번뇌의 장애를 제거해 마친 데서 오는 지족심(止足心)이 그 마음을 온통 쾌적한 고요 속에 빠져들게 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이 여기서 꼭 조심해야 할 일은, 오랜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어렵사리 모든 장애를 제거해 마쳤다는 안도감에서, 자칫 이 '지족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수행자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버리는 깊은 수렁이다. 이 때 그 '마음'은 움직임이 없고, 남(生)이 없어서, 마치 고인 물과도 같이 되고 말 테니,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부처는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참 지혜', 즉 <작용 없는 근본 지혜>(無作根本智)를 주어서 권하기를, 이른바 '깊은 행'에 들어서 나타난 훌륭한 공덕에 심취하여 '즐겨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크게 뒤쳐서, 그들로 하여금 <법의 흐름을 따르는 문>(法流門)에 들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법의 흐름을 따르는 문>이란, 남(生)이 없어서 마치 고인 물과도 같이 되어버린 마음을 뒤쳐서 <무공용행(無功用行)의 흐름>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은 이 부분이 대개의 경우 공부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는 단초가 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생각 있음'과 '생각 없음', '말을 함'과 '말하지 않음', '함이 있음'과 '함이 없음' 등의 '두 갈래'(兩邊)가 그렇게 쉽사리 넘나들 수 있을 만큼 자재한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분별 밖에 알지 못하는 '의식'을 나의 마음인 줄로 알고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의 이른바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생각'이 '바른 생각'(正念) 이라」 는 말이 너무 생소해서 그럴 뿐이다. 이것은 알고 보면 어려울 것도 쉬울 것도 없는 건데, 공연히 '말'에 떨어져서 스스로 알쏭달쏭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가령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해 저무는 석양길을 가다가 제자가 말하기를, 「아! 저녁 노을이 참 아름답구나. 내 마음까지 빨갛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다」고 말하자, 옆에서 스승이 근엄한 목소리로 「함부로 망상을 굴리지 말라!」고 꾸짖는다. 이렇게 된 다면 누군들 움츠러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막무가내로 마음을 찍어눌러서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렇게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하는, 이 일련의 일들이 모두 오직 작용 없는 <'참 성품'의 응현>(眞性應現) 일 뿐이요, 거기에는 '짓는 자'도 '짓는 바'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만 안다면 생각생각마다, 걸음걸음마다 '부처'를 만나게 되지 않겠는가? 결국 중생이 한 생각 일으키는 것이 바로 '부처'가 출흥(出興)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쯤 되어야 비로소 학인들로 하여금 법류문(法流門)에 들게한 성인의 참 뜻을 알 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주로 억누르기만 하던 '뜻'(意識)을 크게 뒤쳐서 '부처 지혜'를 이루어, 도리어 능동적으로 일으키게 함으로써, 학인들로 하여금 널리 '부처 지혜의 바다'(佛智海)에 들게 한 것이다. 즉 능히 마음을 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生死海)를 종횡(縱橫)하게 한 것이니, 이른바 '능히 취향함'(能趣)으로써 문(門)을 삼게 한 것이다.
 
본래 '지혜'는 '의식'을 없애고 나서야 드러나는 게 아니고, 공부가 익으면서 '의식'이 자체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뜻'에 따라 헛되이 생멸하는 '마음의 그림자' 일 뿐임을 알게 되면, 바로 그 '의식'을 뒤쳐서 '지혜'를 이루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제6식을 뒤쳐서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루고, 제7식을 뒤쳐서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고, 전(前) 5식을 뒤쳐서는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제8식을 뒤쳐서는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루는 것 등이다. 그러나 '지혜'가 비록 그 기능을 따라서 여러 가지로 밝혀지기는 했으나, 이 모두가 '한 마음'에 껴잡혀 있는 것으로서, 마침내 '마음의 근원'을 돌이키고 나면 '지혜'는 저절로 다하는 것이다. 만약 그 '지혜'를 고수 한다면 '한 마음'이 어찌 드러날 수 있겠는가.
 
이에 이르면, 만법이 온통 '한 마음의 근원'에 거두어져서 원융무애하여, 바로 지금과 같은 중생의 분별지혜(分別智)가 곧 '문수'(文殊)요, '생사고해'를 헤엄치면서 나날이 겪게 되는 중생의 온갖 진로(塵勞)가 바로 '보현행'(普賢行)인 것이다. 이 '보현행'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중생으로써 체(體)가 된다. 즉, 모든 중생이 본래 스스로 '지음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를 미혹해서 '무명'이 되었으므로, 이에 '보현'이 이들 무명중생의 미혹을 조작(造作) 없이 그대로 따르면서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널리 온갖 색신(色身)을 나투되, 그 '지혜'가 체성이 없기를 마치 '허공'과도 같아서 '조작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그 나툰 바의 색신들이 생멸이 없고, 가고 옴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색신을 나투어서 다만 <허공 같은 지혜의 바다> 로써 일체처에서 미혹을 계도(啓導)하여 '법계 허공계'와 같은 '큰 작용'(大用)을 능히 따르는 것이다.

온 '법계'는 중생들의 <근기 따라 일으키는 느낌>(機感)과, 부처의 <반연(攀緣) 없는 자비의 응현(應現)>이 그 무엇에도 의탁함이 없이 서로 <느끼(感)고 응(應)하면서> 다함 없는 '부사의한 신통'(不思議神通)을 나툰다. 이것은 곧 '지혜의 몸'(慧身)이 결코 '삼매'(三昧)나 '처소'(處所)로써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의 체성'이 '머무르는 바가 없고'(無所住), '의지하는 바가 없기'(無所依) 때문이며, 따라서 중생이 원하고 즐기는 마음을 내면 곧 응현(應現)하되, 그 '처소'와 '의지'(依支)가 없는 것이다. 마치 저 골짜기의 메아리가 음성을 따라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막상 이를 구하려고 하면 그 '처소'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체성'을 돌이켜서 '작용'을 따르기 때문이며>(卽體之用), 이것이 '보현의 몸'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중생의 온갖 생각(想念)이 그대로 '부처 지혜의 작용' 임을 알아야 한다.
 
대저 여래(如來)란, '한 마음'의 진여(眞如)가 '제 성품'(自性) 가운데서 왔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는 것이다. '여'(如)란 변치 않고 달라지지 않고, '제 성품'을 잃지 않기 때문에 '여'라 하며, '내'(來)란 '진여'가 '제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르면서 나기 때문에 '내'라 한다. 이야말로 '옴이 없는 옴'이니, '진여의 성품'은 이미 온갖 곳에 두루하여 '가고 옴'이 없고, 다만 '마음의 느낌'으로 있는 것뿐이기 때문에, 실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마음'을 곧장 깨치면 '행'마다 만족하지 않음이 없어서, '한 마음'으로 만행을 두루 갖추므로 '행'마다 '마음' 아님이 없음을 알 것이다. 대저 모든 '부처 경계'는 다만 <부사의한 '한 마음'의 해탈문>에 나갈 뿐이다. 어찌하여 '부사의 해탈문'이냐 하면, 일체법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있으며, 있는데도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정해진 분량으로 알 바가 아니기 때문에 '부사의'라 하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이 아닌데도 있으므로> '없음'에 머물지 않고, <있는데도 있음이 아니므로> '있음'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있음'과 '없음'에 다 같이 머물지 않으므로 모든 법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 우선 세간법(俗諦)에서 보더라도, 이 세상 모든 법은 다 '있음'이 아니면 '없음'인데, 그렇다면 <'있음'에도 머물지 않고 '없음'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 이라면 어찌 법에 보류(保留)를 당하는 일이 있겠으며, 또한 '참 이치'(眞諦)에서 보면, 일체법이 본래 '성품도 없고'(無性) '모양도 없음'(無相)이니, 눈밝은 사람이면 어찌 '물질적인 장애'(質碍)를 겪는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
 
  『모름지기 뜻(意)에 응할 때, 다만 분별을 끊고, 온갖 사물을 환히 비추되 끝내 그렇게 하기를 쉬지 않는다면, 마침내 산과 강과 석벽 사이도 꿰뚫어 지나리니, 반드시 비출 때 항상 적멸(寂滅)해야 하느니라. 』라고 했던 것이다.

아호(鵝湖)가 어느 날 상당하여 시중(示衆)하기를, ···
  『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핍핍 (逼逼) 한 경지' (境界에 逼迫 받는 경지) 에 떠 있다고 말하지 말라. 설사 '아는 사람'이 '나아갈 곳'이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 하더라도 역시 '핍핍한 경지'에 떠 있느니라. 』라고 했는데, ― 이 말을 들은 운문(雲門)이 법당에서 내려와서 이 이야기를 들어(拈) 수좌(首座)에게 묻기를, ···
  『 화상께서 시중하기를, 「알지 못한 사람도 핍핍한 경지에 떠 있고, 안 사람도 핍핍한 경지에 떠 있다」고 하신 뜻이 무엇인가?』하니, 수좌가 대답하기를, ···
  『 핍핍한 경지에 떠 있구나.』 하였다. 이에 선사가 말하기를, ···
  『 수좌는 여기에 오래 있으면서 머리가 희고, 이가 노랗게 되었거늘,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 그러면 상좌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말하려면 곧 말하고, 보려면 곧 본다. 만약 알지 못했거든 어지러이 지껄이지 말아야 하니라.
  『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핍핍한 경지에 떠 있다」고 한 뜻은 무엇입니까?』
  『 머리에 칼을 쓰고, 발에 족쇄를 찼느니라.
  『 그렇다면 불법(佛法)이 없겠습니다.』
  『 이것은 '문수' '보현'의 <대인의 경계>(大人境界) 니라. 』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