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사람이 「'무명'을 타파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을 멸하여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테니까. 또한 「'자아'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여의고, '남'이라는 생각도 털어 버리라」고 한다면, 거기 대해서도 ― 그렇게 할 자신은 없지만 ― 그래도 그런대로 일단은 수긍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타(自他)의 한계를 허무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해탈'은 물론이고, 이 땅에 궁극적인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일 것이라는, ― 이 태초의 향수 같은 심흔(心痕)이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남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 마음 속에서 '부처'를 공경하는 마음을 지워 버리고, 조사(祖師)를 숭앙하는 마음도 쓸어내 버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던가, 아니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낼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이 진실로 '마음'을 알고 '성품'을 밝히고 나면, ― 본래 청정한 '마음' 속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도 '부처'도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본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볼 것이다. 거기에는 '고'도 '낙'도 없고, 없다는 것도 없어서, 그저 맑디맑은 '허공성' 자체일 뿐, 끝내 상대(相對)가 끊어져서, 집착해야 할 만한 법도 없고 버려야 할 만한 법도 없으며, 알아야 할 만한 법도 없고 알지 못할 만한 법도 없어서, 도무지 인간의 이른바 합리적인 사유로는 아득히 미칠 바 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
(靈覺性)이요, 결코 인연으로 말미암아 변하고 옮기고 하는 일 없이, 온 누리에 두루 하면서 항상 스스로 환히 밝은 이 '신령한 성품'이야말로 범부와 성인이 함께 의지하는 '부동의 영대(靈臺)'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본래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본래도 깨끗하고 지금도 깨끗하여, 갈고 닦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아무도 볼 수가 없고, 아무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이것이 곧 우리들의 '참 마음'이다. 이 '참 마음'은 스스로는 움직이는 일도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일도 없어서, 무시 이래로 일찍이 범부가 되었던 적도 없고, 성인이 되었던 적도 없다.

이렇게 <활연
(豁然)히 일체의 '세속의 기운'(俗氣)을 깨끗이 벗어나서, 성스러움 조차도 없는 자리>(眞諦)에 있으면서도, 그 '세속의 이치'(俗諦)를 조금도 허무는 일 없이, 그저 중생들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를 따르면서, 다함 없이 '무연의 자비'(無緣慈悲)를 베풀어 행하되, 이렇게 영겁토록 이 공적(空寂)한 세상사를 나투고 굴리고 하면서도 전혀 공력(功力)을 들이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이요, 이것이 '부처'요, 이것이 '법'이니, 진실로 이 '마음'을 여의고는 티끌만한 한 법도 따로 성립되는 '법'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마음'을 깨치기만 하면 성불하는 일이 마치 손바닥 뒤치듯 할 따름이니, 무슨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별다른 수속과 절차가 필요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본분(本分)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본분납자(本分衲子)라면 진실로 이 '본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실다운 것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설사 동·정(動靜)의 자취가 다해서 적용(寂用)이 걸림 없는 '열반의 땅'이 현전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증득하는 일은 없다. 만약 '마음' 바깥에 티끌만한 한 법이라도 있음을 보아서, 잠시라도 마음을 둔다면, 이것은 '마음' 밖에 법을 보는 것으로서, 이야말로 오랜 겁(劫)을 두고 앓아온 중생의 고질병임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고인은 말하기를, 「중생에게 네 가지 병이 있으니, 첫째 <'부처' 병>이요, 둘째 <'조사'(祖師) 병>이요, 셋째 <'자기' 병>이요, 넷째 <'남'이라는 병>이니라」 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이 낱낱의 '병'과 모든 '약'을 다 여읠 줄 알아야 비로소 본래 '청정한 자성불'(淸淨自性佛)을 보아서, 영원히 다시는 나갈 바가 없으리니, 이것이 곧 '마지막 깨달음'(究竟覺) 이니라」 라고 했으니,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 심요(心要)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병'도 '약'도 다 여읠 줄 알아야 한다」 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만약 이 말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또 다시 <투쟁과 회피의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여전히 '섬돌 밑의 사람'이라는 핀잔을 면치 못한다.

운문(雲門)이 말하기를, 『 '평지'(淨土) 위에서 죽은 사람이 무수하니, 모름지기 '가시밭'을 통과해야 좋은 솜씨니라』 고 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또는 '참된 것'이건 '허망한 것'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중생의 망정(妄情)으로 요술처럼 지어진 것일 뿐임은 이미 거듭해서 밝힌 바이다. 그럼에도 요즘의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혜'가 충분히 열리지 못하여, 명색이 '불법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면전의 모든 법을 '실다운 존재'로 오인하면서 분별과 집착을 일삼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밝은 안목의 학인이라면 이 삼천대천세계가 미·오(迷悟)와 진·망(眞妄), 정·예(淨穢)를 가릴 것 없이, 그 모두가 마땅히 의지할 것도, 머물 것도 없는 '가시밭'임을 분명히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참된 본분납자라면 <만법 밖으로 훤칠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사가 다 꿈속 같은 것이라면, 그 어디에 '벗어남'과 '벗어나지 못함'을 논할 여지가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이 미묘하게 '몸을 벗어날 한 길'(出身一路)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분별지에 의지하면서 일으키는 유공용행(有功用行)으로는 그야말로 당나귀 해가 되어도 벗어날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운문'이 말한 바, <평지 위에서 죽은 사람들>과 <가시밭을 벗어나야 좋은 솜씨라> 고 한, 이 두 구절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만약 공부하는 사람이 이 두 마디 말에 걸림이 없을 수만 있다면 평생의 공부가 바야흐로 구경을 향해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앞에서 말한 바 네 가지의 '병' 즉, '부처 병' '조사 병', '자기 병', '남의 병'과 이 병들을 다스릴 모든 '약'을 다 여의어서, 이른바 <병이 없으니 약이 필요 없다>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생 공부의 대미(大尾)를 장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 알듯 모를 듯한 이른바 얇은 비단 한 겹이 가린 듯한 보살을 위해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학인들이 항용 더듬는 자취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 가령 제법 큰 뜻을 품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 가는 학인이 있다고 치자. 참으로 인연도 좋고 '사람'도 제대로 만나서, '본분도량'(本分道場)에 의지하여 '본분의 선지식' 을 친견하면서 용맹정진한 끝에, 홀연히 어느 날 희유한 인연을 만나서 깨달은 바가 있으면, '참 나'를 보게 되고, 한 생각에 망령된 식심(識心)이 깨어지면서, <'먼저'와 '나중'이라는 시제(時制 ⇒ 前後際)>가 몽땅 끊어진다.

안으로는 나(生)는 '마음'도 없고, 밖으로는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성품이 비어서 도무지 볼 것이 없다. 범부와 성인도 없고, 중생과 부처도 없으며, '생사'를 벗어날 것도 없고, 기뻐해야 할 '보리'도 없다. 위로는 우러를 것이 없고, 아래로는 '자기의 몸'도 없어서, 그야말로 온 세상이 활연 (豁然)히 트여서, 오직 '참된 하나의 경계'뿐이다. 빛깔과 소리를 대하여도 실낱만한 장애도 없어서, 분별 망상이 나지 않고, 오직 한결같이 맑디맑은 유리알과 같다. 만약 공부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문득 이와 같은 경지가 나타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너무도 놀랍고 기쁜 나머지, 막무가내로 이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는, 영원히 거기서 살 궁리를 차리게 될 것이다. 만약 한 번 이와 같은 생각을 내게 되면 당장에 <무위해탈(無爲解脫)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서 자력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다. 이것이
<평지 위에 죽은 사람이 늘비하다>는 바로 그 병통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도무지 꼼짝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지금 처한 자리가 '구경'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 일말의 불안 섞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꽤 근기가 좋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금 까지 애써 이룩한 공(功)을 훌훌 털어 버릴 생각은 도저히 하지 못하고, 더욱더 힘써 공부를 쌓으면서 세월이 흐르다 보면 다시금 지견이 생겨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진정한 자재(自在)를 얻었다」고 하기도 하고, 「나는 '몸을 벗어난 것'(出身) 이 아니고, 그저 몰록 '본래의 온 몸을 드러냈다'(脫身)」고 하기도 한다. 또 말하기를, 「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뿐 아니라, 그 장대마저도 여의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나아가서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뿐'(唯心)이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이다.

사해(四海)의 물을 한 털구멍에 거두어들이고, 수미산(須彌山)을 겨자씨 속에 집어넣어도 조금도 거리낄 게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참으로 눈밝은 이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무리들을 감파(勘破)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바로 <'가시밭' 속에 주저앉은 무리들>인 것이니, 참으로 겹겹이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인이 말하기를, 「설사 만호선(萬戶禪)이라 하더라도 역시 만 가지 병이 든 생원일 뿐이다」 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참된 수행자라면 결코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의 '신령한 앎'(靈知)을 어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