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통 <무엇>인가를 하지 않게 되던가, 또는 <그것>과의 인연 줄을 끊음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범부나 이승(二乘), 삼승인(三乘人)들의 근성이며, 분별적인 인식작용의 한계이다. 가령 「'자아'의 자취를 완전히 쓸어 없애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얼른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곧, <'나 있음'(有我)을 여의고 '나 없음'(無我)에 처하려고 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진실로 '나'가 없다면 누가 있어서 '나가 없는 자리'를 얻겠는가? 그러나 영겁을 두고 '허망한 정식'(妄識)만을 좇으면서 살아온 중생의 근기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간법의 물리학에서도 「작용(作用)과 반작용(反作用)은 '힘'이 꼭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여실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면 '힘'만이 아니라, '성품'(性)도 '모양'(相)도 '뜻'(義)도, 그 어느 것도 도무지 본래 다르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미 '법계무진연기'를 깨친 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 이 말은 나아가서 저 변증법(辨證法)에 있어서의 이른바 정(正)·반(反)·합(合)의 <'정'(有)과 '반'(無) 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합'(合)은 변증법적인 그 까다로운 추리 추론을 거칠 것도 없이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언제나 '종합'이 성취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곧 말 길이 끊어지고 문자도 세우지 않고, 곧바로 '마음'을 밝혀서 '성불'한다는 뜻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제법실상(諸法實相)이 분명히 이렇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도 아직은 묵은 습기(習氣)가 완전히 다하지 못한 사람은 '있음'과 '없음'이 서로 다를 것도 없고, 같을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작용'과 '반작용'은 서로 다른 현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의 안정되고 쾌락한 삶> 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을 열심히 꾸미고 펼치고 굴리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 '나'였는데, ― 그런데 이 '나'가 '실체'가 없고, '지혜'도 '힘'도 없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라고 하니, ― 이런 경우 근기가 약한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와 같은 주장을 묵살해 버리던가 , 아니면 그 말속에 조금이라도 수긍되는 면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즉 자기로서는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적어도 그것이 '진리'를 깨달은 성인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끝내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예감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가슴속에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것일까? ― 온 몸에서 기운이 쑤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지는 않을까? 갑자기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지지는 않을까? 아니면 그와 같은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억지로 '진리'를 향한 용맹심을 고무하려고 애쓰지는 않을까? ― 이와 같은 종류의 모든 심리적 반응은 바로 '나 있음'(有我)을 여의고 '나 없음'(無我)을 지향하려는 이승(二乘) 근기의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한 인간이 '성스러운 뜻'(聖旨)을 얻어서 '진리'에 계합하면 나라의 임금님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을 청한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만약 자식이 출가하기를 청하기라도 할라치면 왜 온 집안이 초상집처럼 되어버리는 것일까? ― 고시(考試) 공부를 위해 가히 청운의 뜻을 품고 절에 들어갔던 청년이 얼마 후에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마치 초(醋) 친 파김치처럼 되어 가지고 돌아오는 꼴을 본다면 어느 부모가 놀라지 않겠는가? 그들은 절에서 지내는 동안, 어깨 너머로 어설피 주워들은 공(空), 무위(無爲) 등의 '다이제스트' 지식을 통째로 삼켜버리고는, 불가(佛家)의 풍속도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그 놈의 저회주의(低徊主義)에 빠져버린 것이다.

'불법'이란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의 실상 (實相) 을 활짝 깨쳐서 일체의 장애가 완전히 제거된 마음은 가장 활기 차고 생기 발랄한 마음이다. 이 세상에서 보통 '활발'하다는 말을 한자로는 <活潑>이라고 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이런 경우 활발발이라고 쓰는 것을 본다. 이것은 살아있는 물고기가 펄적펄적 뛰노는 형상을 표현한 게 아니겠는가? 또한 「마치 은쟁반(銀錚盤) 위에 옥(玉) 구슬 구르듯 한다」는 표현도 있다.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 사람이면 아무런 조작도 대처도 필요 없이, 바로 <지금 있는 이대로의 마음인 채로> 곧 여여한 '부처 지혜'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터인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서 공연히 빙빙 돌면서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기 약한 사람들을, 그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또 가당치도 않은 샛길로 빠지지 않게끔, 끝까지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 베푼 방편의 말씀이 있다. ― 즉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사람의 무심도인 (無心道人)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느니라」라고 말이다. ―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있는 '나'>를 없애고 나서 <'나' 없음>을 이루는 게 아니고, 이 '나' 는 본래부터 실체가 없는, 전혀 인간의 환상으로 꾸며진 빈 이름뿐인 '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 있음'과 '나 없음'은 모두 빈 말만 있을 뿐이어서, '나'가 있을 때나, '나'가 없을 때나 늘 여여하여,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본래 청정한 제 성품>을 보아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 땅'을 밟게 될 것이다.

 
황룡(黃龍) 화상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
『 <함이 없고, 일이 없는 사람>(無爲無事人)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목에 황금으로 만든 칼(項鎖)을 쓴 것과 같다고 했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하였다.
이에 선사가 대답하기를, ···
『 한 글자가 공문(公門)에 들어오면 아홉 마리의 소가 끌어도 뽑히지 않느니라.』
『 학인이 깨닫지 못하겠으니, 다시 방편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에 선사가 말하기를, ···
『 대유령(大庾嶺)에서의 웃음이 도리어 통곡이 되느니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유령(大庾嶺)에서의 웃음 운운 ··· > 한 것은, 바로 저 육조 혜능대사 (慧能大師)가 황매(黃梅)에서 '법'을 얻은 다음 남방으로 가던 도중에 처음으로 도달한 고개의 이름이 바로 대유령인데, ― 그러면 「대유령에서의 웃음이 도리어 통곡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바로 <대법(大法)을 얻었다>는 기쁨이 도리어 <통곡할 일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본래 <스스로가 신령하게 아는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인데 어찌 거기에 '이루고 허무는 마음'(成壞心)이 끼여들 여지가 있겠는가? 따라서 가섭(迦葉)이 아난(阿難)에게 「저 산문 밖의 찰간(刹竿)을 쓸어 뜨리라」고 한 말과 더불어 깨달아 살피건대, 이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은 결코 갈고 닦고 한 끝에 증득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철저히 깨달을 일이다.
 
시끄러움에서 고요함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범부에서 성인으로, 이렇게 상투적으로 <마땅치 않은 것>을 버리고 대신 <마땅한 것>을 취하면서 이 쪽 저 쪽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이대로의 세간상>이 바로 본래 공적(空寂)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의 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나는 무심(無心) 무아(無我)를 이루어서, 고요하고 청정한 땅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야말로 생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 아닐 수 없다. 고로 모든 선지식이 한결같이 제자들로 하여금 본래 스스로 온전한 영각성(靈覺性)의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허물지 않게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심(奉先深) 상좌와 명(淸凉明) 상좌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어부의 그물에서 잉어가 펄떡이면서 뛰쳐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에 심 상좌가 말하기를, ···
『 명형(明兄)이여! 참으로 날쌔지 않은가! 마치 납승(衲僧)과도 같구나.』 하니 명 상좌가 말하기를, ···
『 비록 그렇긴 하지만 애초에 그물에 걸리지 않은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심 상좌가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
『 그대는 깨달음에 흠(欠)이 있도다.』 하였는데, 명 상좌는 밤중이 돼서야 비로소 이 말의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운문고가 이 화두를 들고(拈) 다음가 같이 송했다.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
『 명 상좌가 깨달았다고 하니, 말해 보라. 그가 그물에 걸린 것인가? 그물에서 벗어 난 것인가?』 하였다.

나중에 심문분(心聞賁)이 이 화두를 들고 말하기를, ···
『 심 형은 그가 그물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고, 명 형은 그가 그물에 들어간 것을 가엾이 여겼다.― 천하의 납승들은 이 이야기를 거론할 줄 만 알았지, 그물이 머리 위에 덮여 있는 줄은 모르는구나!』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