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법은 '공덕의 이익'을 좇지 않는다.
   

수행자라면 거의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바람이 있다. 즉 지금 현재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덕을 쌓아서, 그 결과로 훗날 보다 높고 그윽한 경지, 즉 온갖 걱정도 번뇌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리라는 바람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본인이 그것을 의식했건 안 했건 간에 모든 수행자에게 공통된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 지금은 괴롭고 답답한 마음이었다가, 나중에 가서 벗어나서 깨끗한 마음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항상한 깨끗함'(常淨)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 결코 '항상한 법'이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참된 법'은 결코 그 자신을 바꾸어서 '다른 것'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범부'를 바꾸어서 '성인'의 경지를 넘본다면 이야말로 전형적인 생사법(生死法)이 아닐 수 없다. 생사법을 통해서 어떻게 생사 없는 '부동지불'(不動地佛)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생사법, 즉 현재의 보잘 것 없는 '나'가 어떤 인행(因行)에 의해서 미래에는 훤칠하게 벗어난 '나'가 되리라는 사고(思考)는 철저히 해소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애당초 해탈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설사 수행자가 <'나' 없는 도리>(無我之理)나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를 아무리 되뇐다 한들 거기에는 여전히 장차 공덕을 입기를 기대하는 '나'가 있고, 새롭게 현전(現前)하기를 바라는 '깨달음의 경지'가 있게 마련이다. 결국 그는 생사법의 굴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꼴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공덕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는 결코 '보리심'을 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리심'이란 티끌 하나 바랄 것 없는 마음이며, 법의 '본래 법'은 <법도 아니
고>, <법 아닌 것도 아닌 것>이므로, ― 안으로는 그 '마음'이 바랄 것이 없고, 밖으로는 온갖 법이 성품이 비어서 구할 만한 것이 없으니, ― 안팎이 가지런히 허공처럼 비어서, 설사 공덕을 얻은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또한 '마음 뿐'(唯心)인 도리를 사무친 '일승의 보살'이라면 '마음' 밖에 한 법도 있음을 보지 않겠거늘, 어찌 마음 밖에서 공덕을 구하겠는가? 그러므로 마음 밖에서 공덕의 이익을 구한다는 것은 곧 마음 밖에서 법을 보는 것이니 결코 '일승(一乘)의 마음'을 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사법의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고도 미묘한 것이어서 대부분의 수행자가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최상승의 일승법>을 닦기 위해, 재빨리 그 동안의 수행자세를 바꿔서, 일체의 '공덕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추구하지 않는 마음도 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것이다. ···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여전히 또 하나의 생사법을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굳이 '수행'이라는 이름을 빌지 않더라도, 평상한 매일매일의 삶에 있어서 지금 현재의 '이것'을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저것'으로 바꾸려는 모든 유위행을 당장 쉬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 이 경우에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무슨 소리냐 하면, 결국 '쉬는 자'도 '쉬지 못하는 자'도 '마음'을 깨치기는 글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만약 '일승의 보살'이라면 이런 경우, '쉬지 못하는 것'도 보지 않고, '쉬지 못하는 자'도 보지 않으며, 또한 '쉬는 것'도 보지 않고, '쉬어 마친 자'도 보지 않는 것이니, 이쯤 되어야 비로소 조금은 '쉰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괴로우면 괴로운 채로, 즐거우면 즐거운 채로, 이 모두가 본래 스스로 '성품'이 없어서 허공과 같은 '참된 하나'에 의지하여 있는 또 다른 여러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것'을 '저것'으로 바꿀 까닭이 어디 있겠으며, 또 설사 애써 바꿨다 하더라도, 본래 성품이 비어서 허깨비 같은 온갖 법들 가운데서 어찌 '이익이 있고', '이익이 없음'을 가리겠는가? 바다에 이는 어느 물결이 단 한 순간이라도 그 바다를 여읜 적이 있겠는가?

지금 목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다만 '참 성품'(眞性)의 응현(應現)일 뿐이라는 걸 철저히 사무쳐서, 조작함도 대처함도 없이 그저 '고요히 비추는 것'(寂照)으로 족한 것이다. 공덕이 있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바라고 구해야 할 공덕이 없다는 생각도 놓고, 그저 그렇게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을 담담히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이 '일승의 도'를 가장 잘 지어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