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보살은 초발심에 불과(佛果)를 얻는다.
   

사람들은 보통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기를 바란다. 그것은 마치 흙탕물을 가만히 정지상태로 둠으로써 앙금이 가라앉아 맑은 물이 드러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 고요히 가라앉은 듯 보일 뿐, 작은 충격에도 곧 다시 흐려지고 만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라앉은 앙금을 말끔히 제거하고 맑은 물만 남겨둠으로써 어떤 충격을 받더라도 또 다시 흐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앙금을 제거한다는 말은 다만 비유일 뿐, 뿌연 흙탕물 상태이건, 앙금이 가라앉아 맑아진 상태이건 또, 앙금을 말끔히 제거하여 다시는 흐려지지 않는 상태이건, 이 전과정을 통해 그것이 모두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멸하는 허망한 그림자 놀음이라는 것을 시종일관 간파하는, 그런 지혜와 안목을 갖춘 것이 일승보살인 것이다. 그들은 삼계(三界; 欲界, 色界, 無色界) 자체가 모두 빈 이름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각으로 그 삼계를 나누고 분별해야 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의 있고 없음을 몰록 넘어서서, 무심(無心)이랄 것도, 무념(無念)이랄 것도 없는 그런 경지에서 고요히 그 모든 것을 비출 수 있는 적조(寂照)의 경계가 나타나야 그때 비로소 본래의 청정한 성품이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일승법(一乘法)은 그 어디에도 생각으로 헤아리거나,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어서, 심상한 방법을 통해 현재에서 인행(因行)을 닦고 그 과보로 훗날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 그러한 사회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발심(發心)한 첫머리에 몰록 불과(佛果)를 얻은 일승보살은 본래부터 만법 밖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새로이 벗어나기를 도모하지 않으며, 벗어남과 벗어나지 못함이 모두 고요하여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의 나툼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것이 돈증법(頓證法)인 것이다. 이 길만이 잠잠히 소리 소문 없이 부처의 땅을 밟는 길이니, 인(因)을 닦아 과(果)를 추구하는 어떠한 노력도 한 순간 유위행(有爲行)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유위행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유위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조촐한 마음으로 <무심 무념의 삼매>에 들어서 모든 것을 지금 있는 그대로인 채로 담담히 바라보며 거듭거듭 삼가면서 조촐히 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