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아정'의 '참 마음'은 학인에 의해 중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열반'은 학인에 의하여 증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증득된 것, 즉 '얻은 바'가 있는 것은 '생사법'이지 이것은 결코 '참된 법'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먼저는 미혹해서 '생사법'에 갇혀 있다가 나중에 깨달아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다. 설사 일체의 생각이 완전히 쉬어서 아주 '고요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의근(意根)으로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것일 뿐이다.

수행자가 알맞게 공부가 익어서 어느 날 문득 생멸 없는 '본래 마음'을 깨쳐서, 법성(法性)을 보고 나면, 마치 오랜 겁(劫) 동안 일찍이 한 번도 깨어나 본 적이 없었던 오랜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일찍이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빠져서 허덕였던 적도 없고, 거기에서 헤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일도 없으며, 또 그러는 가운데 나름대로 터득했던 갖가지 그럴싸한 '지혜'들도 모두가 꿈속에서의 허망한 잠꼬대였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해방감이다. 오직 순일(純一)한 허공성으로서의 '신령한 앎'(靈知)이 있을 뿐이요, 도무지 일체의 상대가 끊어져서, 그저 자기 혼자서만 알 뿐, 누구에게 말 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그저 맑고 고요할 뿐이어서 '법락'(法樂) 만이 가득하다.

― 그런데 이 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하기를, 「지금 꿈에서 깬 것은 누군가?」 하는 게 아닌가. 뒤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진 않고, ― 실로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의근(意根)으로 법진(法塵)을 희롱하고 있었을 뿐이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마터면 그것을 '구경'인 줄 알고 거기 머물뻔 했으니, 참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마음'이 어찌 학인에 의해 증득될 수 있겠는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는 '한 마음'>은 공부하는 사람에 의하여 증득되는 것이 아니며, 본래 스스로 온전히 이루어져서 늘 환히 눈앞에서 밝게 빛을 놓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항상 그 '참 마음' 위에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를 오인해서, 저 바깥에 있는 경계인 줄로 잘못 알고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