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차별법은 본래 망령된 분별일 뿐이다.
   


'법의 본래법'은 오직 '참된 하나'(眞一)일 뿐이요, 선·악, 시·비, 득·실 등의 일체의 차별법이 싹도 트기 이전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 움직임이 없는 '참 마음'(眞心)이요, 순일(純一)하고 여여한 '참 성품'(眞性)이며, '하나의 법계'인 것이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 속에는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분별된 온갖 망식(妄識)들이 뒤섞여서, ― 선(善)을 배제한 악과 악(惡)을 배제한 선, 옳음(是)을 배제한 그름과 그름(非)을 배제한 옳음 등 ― 온갖 망정(妄情)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다.

하지만 그 분별이 있게끔 한 정식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 갈등과 충돌이 전혀 밑도 끝도 없는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선'(善)이 있을 때에는 '악'(惡)에 의지해서 '선'이 있게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악'도 역시 '선'에 의지해서 '악'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다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순전히 '망식'(妄識)만으로 허망하게 지어진 허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서로 의지해서 세워지는 것을 '인연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렇게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법은 자체로는 성품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은 이렇게 각각으로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無性), 그래서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둘'을 막무가내로 서로 다른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우선 급한 대로 방편으로 <'둘'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지, 사실은 알고 보면 이 '둘'이 모두 망상으로 지어진 허깨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둘'이랄 것도 없고, '하나'랄 것도 없는 게 진실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내내 토끼의 왼쪽 뿔과 오른쪽 뿔이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그 끔찍한 무명(無明)이라는 것도 마치 허공에 꽂힌 말뚝에 넝마를 걸어놓은 것과 같은 것이니, 뭘 다시 걷어내고 말고 할 게 있겠는가?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 결국 '무명'이 그대로 '도'인 것이다.

이 대목이 곧 '실상의 해탈'을 이룰 수 있는 요체이다. 만약 이 세상이 온통 '선'뿐이라면 '선'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또, 만약 이 세상이 온통 '고요함'뿐이라면, '고요함'이라는 말은 왜 생겼겠는가? ··· '움직이는 모습'을 취했기 때문에 '고요한 모습'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현들도 말하기를,
「<'움직임'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추해서 '있음'과 '없음'까지를 포함한 <모든 형상(形相) 있는 것들>은 이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정식(情識)으로 지어진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모든 있는 바 '형상'은 이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온갖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닌 줄로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실상(實相)이라는 말은 결국 '모습 없음'(無相)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결국 이 경지에 이르면 항상 저절로 '같음' 가운데의 '다름'이요, '다름' 가운데의 '같음'이어서, 이 동이법문(同異法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마음의 흐름이 자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동이법문'을 요달하게 되면, 모든 차별법이 서로 뒤섞이면서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니, 일체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와중에 있은들 무슨 방해로움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