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모든 '유위'가 그대로 '무위'이다.
   


범부의 안목으로 이 세상이 <지금 있는 이대로> 적멸한 열반(涅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늘 보다 나은 어떤 경지, 보다 안정되고, 보다 편안하고, 보다 즐거운 경지를 얻기 위해, 지금 열심히 '원인행위'를 지어감으로써 훗날 이에 상응하는 '과보'(果報)가 얻어지길 기대하는 게 인지상정이고 보면, 오히려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세존(世尊)도 대각(大覺)을 이룬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이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중생들에게 설해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이렛날 이렛밤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셨다 하니, 이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목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무리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진실'이요, 한결같은 성인들의 말씀이고 보면, 당장은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선 성인의 말씀을 믿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우매함을 탓할지언정, 함부로
<성스러운 가르침>에 까닭 없이 의증을 낸다거나, 자신의 지견으로 성인들의 말씀을 재단하려든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이들은 '무명'의 뿌리가 워낙 깊어서, 이 '작용의 주체'도 없고 '수용의 주체'도 없는, 따라서 '함이 없고'(無爲) '모습도 없는'(無相), 적멸한 실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마음은 여전히 <일정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낳는다>는 고전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낡은 물질관, 세계관은 '철학'이나 '종교'에서뿐 아니라, '현대과학'에 의해서도 반증된 지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이 뿌리깊은 고정관념은 좀처럼 다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성인들의 말씀은, 다만 지금의 이 모든 '유위행'이 사실은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는, 마치 꿈속의 일과 같은 것이므로 헛되이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뿐이다. 만약 '유위행'과 '무위행'을 서로 상대되는 두 법으로 보아서, '유위행'을 여의고 '무위행'을 행하는 것으로써 옳음을 삼는다면, 이것은 가장 심한 '유위의 함정'에 빠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교(聖敎)의 '무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의 모든 '유위'가 그대로 '무위'인 것이다. 즉 '유위'도 '무위'도 다 나의 '한 생각'으로 '지어낸 바'(所作)로서, 끝내 '빈 말'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 양변을 몰록 다 여의고는, 그 여읜 자리에도 머물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무위'가 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조작이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거듭 명심해야 한다. 종일 세속의 '유위' 가운데 있으면서도 물드는 일이 없고, 종일토록 온갖 '유위법'을 행하면서도 끝내 <종일 '없는 법'을 굴린 것임>을 분명히 알아서, 자취가 없으면 이것이 바로 성인이 말하는 '무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