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 "
   

우리는 뭔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된다. 즉 '문제'에 대한 묘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행위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미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다.
―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아직 '법에 대한 집착'(法執)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머리가 혼란스럽고,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엇갈린 길목에서 지견이 마구 소용돌이치면서, 도저히 그 의증(疑症)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법도 없고, 지녀야 할 법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난 다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범부들이 걸려든 올가미 중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해야 하는가'(有爲), '하지 않아야 하는가'(無爲) 하는 두 갈래 길에서 늘 이쪽 저쪽 하면서 서성이기를 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지음 없는 지음'(無作之作)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이와 같은 갈림길에서 지견에 지견이 꼬리를 물고, 머리를 굴리기를 쉬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正念)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있다'고 하면 있는 줄로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로만 아는, 이 범부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은 지독하리만큼 고질적이다.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다>고 들으면, 금방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그냥 사태의 흐름에 맡기고 조작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던가, 아니면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취해서는 그것으로써 '올바른 뜻'이라고 여기면서 망식(妄識)을 굴리기를 쉬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회심(廻心)의 묘한 이치>를 알 수 있겠는가?

<지금처럼 그렇게 '하는 것'(有爲)이 바로 '하지 않는 것'(無爲)이라는 사실>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당장 깨달아 마쳐야 한다. 모름지기 '참된 가르침'이라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을 버리고,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속절없이 인연을 따르면서 이쪽 저쪽 하는 '유위행'(有爲行)이요, '생사법'(生死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찌 '참된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그 글 가운데서 어떻게든 규범을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바로 범부의 고질적인 근성이니, 만약 지혜로운 이라면 어찌 황금을 가지고 또 다시 황금으로 바꾸기 위한 궁리를 계속하겠는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