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법(因果法)의 실상
   

흔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기설(緣起說)의 깊은 뜻을 살필 때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른바 인과법(因果法)이나, 또 물리학에서 말하는 인과율(因果律)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물의 존재성에 대하여 사람들이 외통수로 생각 하고 있는가를 절감하게 해 준다.
그 한 비근한 예로, 세속에서 가끔 논란거리가 되곤 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웃지 못할 '말장난'을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 속에서 그 끄트머리를 좇으면서 요즘도 가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닭'과 '달걀'을 구체적인 고유의 실체성을 갖고 있는, 이른바 <존재론적인 실체>로 오인하는 데서 기인하는 부질없는 관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금방 "닭과 달걀이 실체가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따지고 들 게 뻔한데, 사실은 이 대목이 바로 <속인>과 <올바른 수행자>의 안목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사고(思考)의 분수령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불가에서는 연기설을 가리켜 우매한 중생들의 존재에 대한, 즉 그 골치 아픈(?) 이른 바 '경계'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갖추게 함으로써 천년 묵은 속기(俗氣)를 벗어 던질 수 있는 훌륭한 계기로 삼는 것이다.

거창한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 그렇다면 '결과'라는 것은, ―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 전적으로 타(他)에, 즉 '원인'에 의지해서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라는 것은 모두 '제 체성'이 없는,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결과'가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이 실체성이 없는 것이라면 '원인'인들 어떻게 혼자서 세워질 수 있겠는가? '결과'가 있어야 '원인'도 비로소 '원인'이 되는 것이고 보면, 이 '원인'도 또한 똑같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결국 '원인'도 '결과'도 전혀 '정식'(情識)에 의해서 헛되이 세워진, '빈 이름'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를 부를 수 있겠으며,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에 응수(應酬)할 수 있겠는가? ··· '닭'도 '달걀'도 모두 '빈 이름 뿐'인 것이다.

이것은 '인과법'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명히 '원인'이 계기가 되어서 '결과'가 나기는 한다. 그러나 다만 지금껏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인'이 '결과'를 내는(生) 것이 아니고,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에로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옮아간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원인'은 '결과'를 낳을 계기가 되어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분명한 사실은, 옛날 것'이 지금에 온 것이 아무것도 없고, '지금의 것'이 옛날로 간 일도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뭔가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서 끊임없이 가고 오고 한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자체의 성품이 없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허망한 존재가 결코 존재를 낼 수도 없고,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야기되는 이른바 무명의 방황인 것이다.

'원인'이건 '결과'이건, 이 모두가 다 '빈 이름'일 뿐이어서, 이 세상에는 도무지 가고 오고 한 흔적조차 없는 게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간에 그 모두가 전혀 사람들의 허망한 분별에 의지해서만 존재하는,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는 것은 필연인데, 그 '원인'이 지금에 온 것이 없고, 따라서 '결과'도 과거로 간 것이 없다면, 이 어간에서 전혀 아무것도 가고 오고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바로 <옮김 없는 이치>(不遷論)
이며, 「강물은 끊임없이 도도히 흐르는데 일찍이 한 방울도 흐른 일이 없다」고 하는, 얼핏 듣기에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 있게 된 논거(論據)인 것이다.

따라서 진실을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항상 그 모두가 순간순간 스스로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뒤가 항상 말쑥하게 끊어져서 전혀 앞뒤에 이어 닿는 것이 없으니, 거기에 무슨 '탈'이, 즉 무슨 '문젯거리'가 따라 붙을 여지가 있겠는가? 결국 이 세상의 삼라만상 모두는 일체의 '범정'(凡情)과 '이름'이 붙을 여지조차 없는, 그야말로 그 자체로서 스스로 청정한 존재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을 얻는 첫걸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