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性相)이 함께 항상 머무른다.
   

중생의 업은 너무도 뿌리깊고 완고한 것이어서, 불자(佛子)이건 아니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새장 속의 앵무새조차도 되뇌일 수 있을 만큼 흔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 진정한 뜻을 사무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체의 변화하고 옮기고 하는 형상(形相)은 모두 인연을 따르면서, 마치 거울에 나타난 '빛의 얼룩'과도 같은 것으로, 실제로는 전혀 왕래하는 자취가 없는 것이며, 또한 신령스러운 '진여법성'(眞如法性)은 스스로는 조금도 변하고 옮기는 적이 없으면서, 다만 인연에 감응하여 만법을 두루 나툴 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일체만유가 모두 이 '진여법성'의 나툼이 아닌 게 없으니, 뭇 생령(生靈)과, 그것들의 온갖 생명활동,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간에, 어느 것 하나 빠뜨림이 없이 고스란히 '부처 몸'의 천백억 분신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지에서 누가 '깨달은 사람'이며, 무엇이 '깨달은 바'이겠는가? 이 온갖 것이 모두, 털끝만한 한 법도 남김 없이 '불사'(佛事) 아닌 게 없고, '부처' 아닌 게 없는, 그야말로 통틀어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일찍이 '부처'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 지금에 새삼스레 '부처' 되기를 바랄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어느 날 앙산(仰山)이 위산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참 부처'가 사는 곳입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 묘한 이치로써 '신령스러운 불꽃'의
    무궁한 자리를 돌이켜 생각하여, 마침내 생각이 다해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과 형상'이 항상 머물고>(性相常住), <이·사가 둘이 아니리니>(理事無二),
   이것이 '참 부처'의 여여함이니라.』고 하니, 앙산이 이 말 끝에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나름대로의 지견을 말아내어 「'인과법'은 모두 빈 것이다」
라거나, 「'인과법'은 엄연히 행해지고 있다」느니 하면서 '있고 없음'과 '옳고 그름'을 놓고 계속 시비를 벌인다면, 이것은 마치 왼쪽 '토끼 뿔'과 오른쪽 '토끼 뿔'의 길고 짧음을 놓고 실랑이를 계속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니, 모든 시비가, 그 시비의 내용을 불문하고 모두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 '옳은 것'이다. 즉 '먼저'는 '먼저'이고, '지금'은 '지금'이고, '나중'은 '나중' 이라고 하건, 또 한 생각 더 굴려서, 이 모두가 '동시'라고 하건, 이와 같은 말들이 다 '빈 말'일 뿐이라는 것이지, 이 중 어느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에도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시비 가운데 있으면서도 결코 물드는 일이 없어야 진정으로 '시비를 벗어난' 좋은 솜씨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도 이르기를,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始成正覺)고 하는 것은,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온갖 삼세고금(三世古今)의 법이 '한 생각' 가운데 있어서,
   '오래 된 것'이라거나 '얼마 되지 않은 것'이라거나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한 생각' 가운데 또한 일체중생의 <삼세(三世)와 멀고 가까운
   겁(久近劫)을 분별하는 지혜와, 온갖 차별된 지견의 지혜를 허물지 않음>을 증득하는
   것 이니라.』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