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이해'에는 자취가 없다.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요즘 그대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
  『티끌만한 한 법도 마음에 붙여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를 호되게 한 방망이 때렸다. 나중에 누군가가 그 스승에게 그때, 그렇게 말한 제자를 때린 까닭을 물었더니, 그 스승이 말하기를, ···
 
 『만약 그때 내가 때리지 않았으면, 나의 '견해'가 그와 같다고 알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불법에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수행자라면 「'모든 법'은 그 어느 것도 본래 '진리' 아닌 게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 말의 참 뜻을 깊이 참구하지 않고 소리만 외고 다님으로써, 그들의 공부가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그 근본 뜻은 한 가지 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선지식의 방편의 말씀이나 각각의 실제적인 상황들을 접하게 되면, 처음 대하는 묘하고 새로운 경험쯤으로 여기고는 또 다시 그에 대한 새로운 지견을 쌓아 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대다수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히 이분법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중생들에게, 또 어딘가에 늘 속해 있다는, 이른바 '소속감' 가운데서 모종의 안정감을 찾는 중생들에게 이러한 말씀들이 절실하게 와 닿게 되기까지는 끝없는 의증과 깊은 참구가 따라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좀처럼 소화되기 어려운 일이다.

위의 말씀을 늘 되뇌이고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에 속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이 말은 그에게 있어서 짊어지고 다녀야 할 또 하나의 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 각자가 전적으로 그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는 일체의 것, 즉 '국가'와 '민족'과 '신앙', '철학' 등, 심지어 나아가서는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서조차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이는 결코 그것들과 결별하고 반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반대하고 멀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는 것이다.

가령 그 전에는 좋고 싫은 게 너무 분명해서, 내가 싫은 것은 도저히 용납할 여지가 없었던 그 마음에 우선 조금이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라도 마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접근에서 시작해서, 마침내는 그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즉, 나의 불찰로 인해 잃어버렸던 내 마음의 나머지 반쪽을 회복함으로써 원래의 '완전한 마음'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비록 마음에 합당한 것이건 아니건, 또한 좋은 것이건 싫은 것이건, ― 아직은 온전히 바닥을 사무치지 못해서, 여습(餘習)이 남아 있더라도,―
그 모두를 평등하게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착실한 지름길이 될 것이다. 여기서도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이 모두가 유위(有爲)의 억지놀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법의 '남(生)이 없는 도리'와 '성품 없는 도리'를 철저히 사무침으로써, 일체의 분석적 지견이 다했을 때, 그 '본래 마음'은 저절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