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 불래불거는 불법의 근본이다.
    저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면서도 끝내 '바다' 그 자체에는 전혀 아무 변화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즉, 그 겉모습의 물결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본체인 '바다'는 늘 그대로인 채로, 늘고 주는 일도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 데는 전혀 아무런 이론이나 학식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즉, 진실이 스스로 본래 그런 것이다.
 
이것이 곧 「일체만유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는 진리」(無生法忍)인 것이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하고, 곤혹스럽게 하는, ··· 저 이른바 「불생불멸 불래불거의 이치」(不生不滅 不來不去), ··· 불법(佛法)의 근본을 이루는 이 난해한 이치는, 사실은 전혀 난해할 것도 없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사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사실 앞에서 왜 그렇게도 혼란스러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 인간이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그것이 모두
<진실의 겉모습>뿐인데도 우리들은 마치 '진실' 전체를 남김없이 몽땅 보고, 또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나날을 살고 있는 것이다.

모두(冒頭)에서 <바다와 물결의 비유>를 들었는데, ··· 일부 뛰어난 과학자들이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부터 이른바 <사고실험>(思考實驗)을 해 보기로 하자.
즉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바다>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불가(佛家)에서는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 (一眞性海)라고 부른다. 왜 <하나의 참된 ···>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우리들이 모두에서 알아보았 듯이, '바다' 전체로 볼 때에는 전혀 변화하고 이동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매일같이, 아니, 매순간마다 경험하는 이 현실세계의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저 바다가 다만 바람을 따라 물결치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는 쉬지 않고 늘 출렁인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흡사하다. 분명히 '바다'는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항상 자기의 <성품과 모습> (고요함과 움직임이 둘이 아닌) 을 유지하면서 생멸하거나 증감하는 일이 없다. 즉 '바다'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도 사실은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실상은 상주(常住)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만 무수히 많은 인연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마치 저 바다가
<바람 따라서 물결치는 허망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실상(實相)은 결코 생멸하지 않는다. 인연의 바람이 일거나 말거나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되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연 따라 항상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모든 이 세상의 변천상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전혀 '참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인연 따라 생멸하는, ··· 따라서 생겨나도 생겨나는 일이 없고, 생겨난 일이 없으므로, 사라지는 일도 없는, 이 <불생불멸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진실>에 눈을 뜨는, 즉 '깨달음'을 얻는 순간인 것이다. 이 경지를 불가(佛家)에서는 <부동지>(不動地)라 하며, 또한 <동진지>(童眞地)라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외견상 엄청나게 변화 변천을 거듭하는 것 같지만, 진실은 전혀 움직이는 일이 없으므로 <부동지>요, 무지몽매한 범부가 처음으로 참된 지혜가 열리는 순간이므로 <동진지>니, 마치 어린이(童蒙)가 처음으로 이 세상의 진실상(眞實相)을 깨닫는 것과 같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에 들어가 무애자재(無碍自在)한 활동을 일으켜서, 무명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 것, 이것이 곧 <일승 법문>(一乘法門)이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에 대해 알고 있다. 지금부터 불과 300 여 년 전, '코페르니쿠스'라는 천재가 나타나서,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이 움직인다"고 설파했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얼마나 한 충격을 맛보았을까? 그러나 오늘날 '지동설'(地動說)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결코 움직이는 모습이 없는, ··· 말 그대로 요지부동인 이 땅이 지금 맹렬히 소용돌이치면서 이 우주공간을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을 ― 우리들의 시각적 경험과는 상관없이 ― 지금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멀게는 2500 여 년 전 '붓다'에 의해서, 또 가깝게는 20 세기 초엽, 많은 천재적 과학자들에 의해서 제창된) "모든 존재가 존재인 채로 존재가 아니고, 모든 움직임이 움직임인 채로 움직임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고, 이 말에 믿음을 내고, 믿어 들고, 받들어 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이 말을 단지 어떤 특정 종교의 <오묘(?)한 교리>쯤으로 치부하고, 숫제 깊이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는 게 작금의 실정이다. 심지어 그 '불교'(佛敎) 집안에서조차 이 엄연한 진실 앞에서 여전히 망령되게 존재론적인 관념의 유희만을 거듭할 뿐, 이 '일승법문'에 깊은 믿음을 내고, 믿어 들어서,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서 수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습이 있고, 이름이 있는 일체 존재가 모두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허망하여, 실다운 존재가 아닌 세계, 이른바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헤아리거나 짐작할 수조차 없는 이 세계의 <광대한 지혜의 바다> (作用 없는 根本智와 凡夫의 分別智가 완전히 혼융된) 에 들어서, 이지(理智)에 맡겨 마음대로 종횡하면서 대자대비의 원력을 발휘하여, 까닭 없이 고뇌의 바다에 빠져서 헤매는 중생을 건져낼 수 있다면 이 어찌 대장부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뜻이 있고 힘이 감당할 만한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힘써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