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모든 <대립의 피안>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온갖 것이 가고 옴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 여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을 오랜만에 보면서 "몰라보게 컸구나"하는 말을 곧잘 하곤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 그 어느 존재도 자체의 성품이 없다 "는 말을 깊이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 아이를 알아본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로 이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의 육신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고 동시에 늙은 세포는 사라지면서 말이지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변한다는 말은, 한순간 전의 <나>와 한순간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 독립적인 실체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성장한 듯이 보이지만, 그러한 지속적인 진화의 현상은, 우리의 착각 때문에, 일어난 듯 할 뿐이지 그런 현상은 원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매 순간 새로운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랫동안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순간순간 다른 아이를, 역시 순간순간 다른 <나>가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알아보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불완전한 경험에 의해 축적된 우리의 기억 때문입니다. 매 순간 새로운 대상을 대하면서도 우리는 늘 낡은 기억 속에 저장되어있는 그 대상과 비슷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와 동일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거기에는 새로운 만남이나 창조적인 만남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항상 새로운데 우리의 반응은 언제나 낡은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한순간 전의 <옛것>으로부터 한순간 후의 <새것>으로 옮아온 실질적인 '에너지'의 이동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 매 순간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자(孔子)도 그의 제자 안회(顔回)에게 다음과 같이 경책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것>과 <옛것>, 즉 앞뒤의 것이 서로 도달하지 못하므로 단 한 물건도 옮아갈 수 가 없는 것이며, <지나간 때>는 지나간 때에 머물고, <옛날의 형상>은 옛날에 머무니 이것이 바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불천(不遷)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달 전의 아이가 오늘로 옮아왔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우리 의식의 왜곡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깨달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승조(僧肇)선사의 다음 말씀은 그러한 왜곡된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산에 도달한 바람은 처음에 불기 시작한 그 바람이 아니요, 매 순간 새로운 바람이며, 쓰러진 산도 처음의 큰 산이 아니라 새로운 산인 것이지요. 그러니 한바탕 큰 바람이 불어 큰산이 쓰러졌다는 현상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매 순간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산만이 있는 것이니 고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모든 사건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발전하고 전개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우리의 분별적 개념이 지어내는 환상으로, 이러한 착각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인 전 우주를 토막토막 나누어 단편화된 부분밖에 볼 수 없게끔 제약하는 우리의 특유한 의식구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모든 <물질적 존재>가 각기 고유의 독립적 성질을 가진 실재가 아니라면, 곧 그런 '물질'이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의 목전에서 전개되는 모든 시간 공간적인 변화는 전혀 왜곡된 인식작용이 빚어내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