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일까?
 
있는 모든것이 인연따라 생멸하므로 자체의 성품은 없는것입니다.
   
 
   
  우리는 '그림자'나 '메아리'가 진실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메아리' 또한 전적으로 '소
리'의 있고 없음에 매어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인연 따라 생멸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존재성이 없으며, 동시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새삼스러울 수 도 있는 이러한 자각은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존재'에 대한 기존의 <존재론적
물질관>이 그 근저로부터 붕괴되는, 실로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전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ⅰ) 인연 따라 생멸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존재성이 없다.
  ⅱ) 이 세상에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ⅲ)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
   
  아주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삼단논법이지요. 하지만 세 번째 항목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조금만 그 의미를 깊이 새겨본다면 우리는 전율에 가까운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물질적 심리적 일체 존재를 막론하고)는 진실된 존재가 아니라는, 곧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허망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일체 존재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 그 무엇도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우선 <나>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는 무엇이겠습니까? ··· 피부(皮膚)일까요?
일단 이런 극히 상식적인 대답을 인정하여,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피부'로 설정해 보지요. ···
'피부'의 안쪽이 <나>이고, '피부' 바깥쪽은 <나>가 아니라는, 이 유치한 생각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는 <나>의 바깥 세계와 아무런 교섭 없이 독립적으로도 능히 그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멀리 생각할 것 없이, 만약 "밥"이 없으면 <나>는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물"이 없다면 ···, "공기"가
없다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밥"과 "물"과 "공기" 등을 떠나서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나>의 일부라는 것이지요. "나의 눈"과 "나의 귀", "나의
심장"이 나의 일부인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며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이미 이 우주 전체에
두루해 있
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곧 "우주"요, "우주"가 곧
<나>
인 것입니다.

결국 '우주'란 <나>까지를 포함한 유기적 전체로서, 이 우주를 우리는 토막토막 갈라진, 수없이 많은 부분
부분으로 갈라놓고는, 그것들이 마치 독립적인 개별성과 주체성을 갖고 있는 '실체'인 양 오인하고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지요. 「저 놀라운 깨달음의 순간에 이 우주는 통일된 <참된 하나>로서 그 경이로운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렇다면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듯이, '붓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붓다'가 깨달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붓다'가 깨달음에 도달한 순간, 이미 '새벽 별'은 '새벽 별'이 아니고, '보리수'도 '보리수'가 아니고, 거기
앉아서 깨달음에 도달한 <나> 자신 또한 <나>라는 개별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실체로 알고, 그에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의 삶.
이제 그 허구성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