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변 >

　아직 법문을 못 알아듣고 있소. 그저 세속의 강의나 강연 듣듯이 말하는 내용

가운데서 뭔가 묘한 이치를 알아듣고 그런 것들을 많이 기억하고 많이 간직하는

것을 공부인 줄 아는 사람이 태반이오. 그건 전혀 거꾸로 가는 거요. 골병드는

거라 소리요. 이 말엔 조금의 과장도 없소. 여러분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 말의 뜻을 분석하고 헤아리고 짐작해서 ‘이건 이 뜻이구나, 저건 저 뜻이구나’

하고 알아듣는다면, 그건 알아들을 때마다 진실과 멀어지는 거요. 그런 식으로는

그 본래의 신령스런 지혜는 전혀 가늠도 할 수 없소. 그래서 ‘법문 들을 줄도 모

른다’ 소리가 나오는 거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소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뜻을 깊이 참구 안

하기 때문에 여전히 보고 듣는 가운데서, 빛깔과 소리 가운데서 이쪽저쪽 하느라

정신이 없소. 이 자리에 와 앉아서도 귀로 들려오는 말과 내용을 계속 분별하면

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취사선택 하며 지견을 계속 꼴딱꼴딱 집어삼키고 있

다면, 그건 법문을 듣는 게 아니고 독을 들이키고 있는 거요.

　그럼 이런 소릴 듣고 대번에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하고 묻고 싶을 거

요. 그렇게 물으면 틀린다 이 소리요.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어떻

게 할 놈도 없고, 어떻게 할 일도 없고, 시종일관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은 것이 진실이라고 아무리 드러내 보여줘도, 계속 무슨 일이 일어났으니 ‘내’가

잘 살아가기 위해, ‘내’가 어서 깨치기 위해, 요령 좋게 잘 대처해야겠다는 거 아

니오? 도대체 답답할 일이 뭐요, 허깨비가? 결국 밥과 반찬의 힘으로 설치는 이

‘나’란 놈이 허깨비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 거요 지금. ‘나’뿐

만 아니라 세상만사가 몽땅 그저 인연이 모이면 허깨비처럼 잠시 난 듯 보이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듯 보이는 것이니, 거기엔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어서,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늘 공적(空寂)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오. 바다가

인연 따라 아무리 물결쳐도 물은 늘 그대로라 소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