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변 >

　많이 공부해서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이 실상을 훨씬 날카롭고 예리하게 볼 거

같지요? 그렇지 않소. 그 숱하게 많이 축적한 지견, 그 아는 것들이 뿌옇게 앞을

가려 정작 실상을 제대로 보기가 훨씬 더 어렵소. 선험적(先驗的)인 지견이 자리

하지 않은 맑은 마음, 이미 보고 듣고 해서 쌓인 지견이 없는 맑은 마음이어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주 날카롭게 볼 수 있소. 날카롭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날

카로운 것도 무딘 것도 아니오. 그저 있는 실상이 보는 새 없이 그대로 와 닿는

거요.

　이미 들은 게 많고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은 원인 따라 결과가 난다는 말을 들었

을 때, 그걸 그저 “아, 인연법을 말하는 거구나” 하며 한 토막 지견으로 듣고 흘

려버리는 것으로 끝이요. 하지만 어린 아이의 마음처럼 그 마음속이 늘 맑고 간

직된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은 “결과가 전적으로 원인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원

인에 기대서만 결과가 나는 것이라면, 그럼 결과는 빈 것이다”는 사실까지 꿰뚫

어 볼 수 있소. 거기엔 지금까지의 상식이나 “그래도 그렇지만” 따위는 붙을 여

지도 없소.

　‘자체로는 성품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존재론 속에 갇히는가 아니면 벗어나는

가의 중요한 갈림길이오. 우리 마음속에 소위 질애(質碍), 물질적인 장애가 왜

생기는가? 원인 따라 ‘결과가 실제로 났다’고 보기 때문이오. 그런 일은 없소. 인

연 따라 난다는 것은, 나기는 나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난 것이 없다는 소리요.

꾸역꾸역 집어삼킨 상식이나 지견으로 그 마음속이 온통 뒤범벅이 돼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질 못하오. 그동안 자기가 살아온 근거가 없어지기 때

문이오. 실상 보다는 그동안 자신이 의지해 살아온 상식이 훨씬 더 익숙하고 그럴

싸하게 보이기 때문이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이 길을 갈 수가 없소. 진실 앞에서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믿어 간직해 온 바를 얼마나 흔쾌히 털어버릴 수 있는가,

그것이 관건이오. 그래서 대장부의 결기를 말하는 거요.